상담사로서 더 많은 분에게 제도적 혜택을 주고 싶었다

상담사 출신 민주당 이경화 서산시의원
상담사 출신 민주당 이경화 서산시의원

정치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내 안에 꿈틀대던 오지랖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길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정치였다고 말하는 이경화 의원.

릴레이인터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핫 코너 서산시의원의 근황과 생각들을 직접 묻고 시민들에게 전해주는 코너에 이번주 인물 서산시의회 이경화 의원이 등장했다.

Q 성장 과정을 말해달라

오빠 둘에 막내가 바로 나다. 남들은 외동딸이라서 이쁨을 많이 받았을 거라 하지만, 이쁨보다는 막 자란 편이 맞는 것 같다.

손자들만 사랑하신 할머니의 영향으로 왜 여자들만 불이익을 받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여자이길 포기하고 나도 오빠들처럼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그래서 한때 별명이 말괄량이 삐삐기도 했다.

Q 학창시절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인사를 잘하고 다녀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과자와 용돈을 받곤 했고, 놀기를 좋아해 학교가 끝나도 해가 질 때까지 학교 안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했다. 그러다 걔중 유난히 개구쟁이 남자애가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면 나는 악착같이 쫓아가 응징을 하곤 했는데 훗날 들으니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내 별명을 글쎄 독사라고 불렀단다(웃음)

놀다 돌아보면 친구 한둘은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학원으로 가곤 했는데, 나는 그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2달 정도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당시 돈으로 15,000, 학원비가 없어 딸의 소원을 외면했던 우리 엄마. 결국 나는 학교에 남아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고 보면 뭐든 하고 싶으면 실천에 옮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바로 나였다.

Q 부모님의 교육관은 무엇이었는지?

농한기에는 의례 우리 아버지는 서울 공사장으로 일을 하러 가시곤 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갑자기 사고를 당하시는 바람에 중환자실에 오랫동안 계셔야 했다. 나와 작은 오빠 둘이서만 근 1년을 살면서 학교에 다녔던 시절,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보면서 늘 목에 가시처럼 걸리셨는지 출세 지향적인 직업군(?)을 찾도록 학교 선택을 강요하셨다.

성적과는 상관없이 큰 오빠에게는 육군사관학교를, 작은 오빠에게는 공업고등학교에 합격했음에도 인문계를, 그리고 내게는 경찰대학교를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셨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어려운 시절, 개천에서 용나는 길이 이 길이라 생각하신 것 같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자식들을 보호해주느라 애 꽤나 쓰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고, 중학생이 되어서까지 아이들에게 많은 책을 읽어주는 자상한 엄마일수 있었다.

Q 나의 사랑 나의 직업

마케팅이라는 일을 해보고 싶어 20대 후반 늦은 나이에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곳에서 마케팅보다 더 소중한 남편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호주에서 만난 남편은 대학교 4학년 엘리트 학생이었고, 나는 후에야 그 사람보다 내가 누나인 줄 알았다. 이미 그때는 서로 사랑에 빠졌고 그렇게 나는 사랑하는 경상도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어린시절 독서 결핍이 있었는지, 우리 아이들에게 유난히 책을 많이 읽어주었다. 그 덕분에 결혼 초기 책을 사주기 위해 웅진에서 영업하기도 했던 나. 우리 애들 읽는 책 정도는 가계에 부담이 되지 않게 내가 벌어서 사주겠다는 당찬 결심 때문이었다.

웅진에서 내 삶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책을 가까이하다 보니 교육학, 심리학, 상담 등 아이들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학문을 접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것이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사가 된 계기가 됐다.

Q 왜 정치를 하게 됐는지 계기가 있나?

평소 그냥 세상이 상식적이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일 해 주었으면 좋겠다. 착한 사람이 잘살고, 나쁜 사람들이 벌을 받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학교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부당함과 편견을 접했고, 그러던 찰나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을 만나면서 상담보다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Q 시의원이 되고 나서 힘든 점은?

기존의 정치 패턴에 익숙해져 있는 것에 내 생각과 신념이 부딪쳤을 때였다. 예산의 경우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엔 정당이 있고 의원들 또한 지역구 챙기기에 전념하는 경우들이 있다. ’아니다란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때 내가 왜 시의원이 됐지!’라는 반문과 자괴감이 든다.

혹시 이 말을 보고 속상하신 분이 있다면 상황이 다르므로 일어날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아줬으면 좋겠다.

국비 사업도 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국비도 세금이니까 엄연히 세금 낭비면 안하는 것이 맞다. 공모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안 해도 되는 사업이 이루어지는 경우, 이런 것들을 보면 마음이 힘들어진다. 시민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Q 서산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나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경제성장과 환경 문제가 충돌하면서 많은 갈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서산이 되어야 하고, 환경 문제도 줄어들어야 하고. 하지만 기업과 머리를 맞대고 환경 문제를 고민한다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 답이 있을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역사, 문화, 자연을 잘 살려서 관광산업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먹고,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들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서산을 충분히 개발해야 할 것이다.

Q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현안들은?

고령화, 저출산 그리고 환경이다. 우리 서산지역은 고령화 농경지역이다. 어르신들에 대한 복지와 처우가 서산만의 특성에 맞게 선도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다. 물론 중앙정부에서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하겠지만.

저출산은 비단 서산시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문가들과 함께 깊이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눈에 비치는 것은 우선 교육정책에 좀 더 신경 썼으면 좋겠다. 환경문제는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 서산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해야 한다고 본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금은 전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을 넘어 공황상태가 됐다. 그러다 보니 정신력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한마디 말에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세 치 혀의 장난에 소중한 의지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지금은 믿음이 어느 때 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다.

어려운 시기인 만큼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믿음과 용기를 주는 말이 필요할 때다. 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따뜻함이 필요한 요즘이다. 그러니 다들 힘내서 다시 일어서는 서산시민, 대한민국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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