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쌤의 미술읽기-24

자화상(自畵像)/윤두서(尹斗緖)/1668~1715/18세기 초/국보 240호/종이에 담채/38.5 × 20.5cm/전라남도 해남 윤형식 소장
자화상(自畵像)/윤두서(尹斗緖)/1668~1715/18세기 초/국보 240호/종이에 담채/38.5 × 20.5cm/전라남도 해남 윤형식 소장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말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한 말이다. 여기서 얼굴은 자신의 생김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는 이미지나 인상과 같은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내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나에게는 40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이제 며칠 뒤면 마지막 30...시간이 이리 빨리 갈 줄이야! 나도 이제 얼굴을 책임져야 할 때가 되었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아줌마가 되어 좀 더 동그래진 턱선은 내가 그동안 둥글게 세상을 살았다는 흔적일까? 오늘따라 두 개의 턱이 되어버린 동그란 얼굴 대신 오직 나에게만 집중했던, v라인이 살아있는 20대 광고모델처럼 화장이 하고 싶어진다.

토요일 아침, 차 안에서 남편은 요즘 부쩍 거울을 보며 자신이 못났다는 말을 한다. “여보, 좀 관리하고서나 그런 말을 해. 로션도 좀 바르고자기 꾸미기가 로션 바르기가 전부인 40대 남자와 그래도 꾸미고 싶어 하는 30대의 마지막을 달리는 여자의 대화에는 묘한 침묵이 돌았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남편과 나는 차 안에 앉아 각자의 거울을 보며 자신을 관찰한다. 나는 좀 더 어려 보이기 위해서 눈썹은 조금 도톰하게 그리고, 입술은 틴트로 살짝 마무리하고. 남편은 지난주 이발로 부쩍 짧아진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화장을 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이 본 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본 것처럼 남들에게도 보일까? 도대체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화장을 하는 거지? 작은 손바닥만 한 거울 속에 꽉 찬 내 얼굴을 보며 윤두서의 자화상이 생각났다.

호가 공재(恭齋)인 윤두서의 본관은 막대한 부를 가진 해남(海南)윤씨로, 1668(현종9)년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나 1715(숙종 41)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였다.

그는 실학으로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천재 화가들을 바로 삼원(三圓)’삼재(三齋)’로 불렀다. 삼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도원 장승업을 말하고, 삼재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호에는 모두 또는 가 들어갔는데 윤두서의 호는 공재였기 때문에 삼재(三齋)라 불렀다.

1944년 추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가져온 손재형(19031981)은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정선(鄭歚, 1676~1759), 심사정(沈師正, 1710~1760)의 작품을 모아 삼재화첩(三齋畵帖)’을 열기도 했다.

윤두서의 뛰어난 작품 중 나에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바로 미완의 형태로 남겨진, 얼굴만 그려진 자화상이었다. 그의 자화상은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 초상화로 알려져 있으며 유일하게 국보(240)로 지정된 자화상이다.

특히 얼굴만 덩그러니 그려진 이 그림은, 원래는 아래도 그림이 그려져 있는 형태의 작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만 남은 채 전해지게 됐다. 그런데 미완의 형태로 남은 이 초상화가 잘 그려진 그림보다 울림을 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나이 43세에 그려진 그림 자화상1712년 고향 해남으로 내려와 은거하기 2년 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윤두서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아마 수없이 많은 시간을 거울 속 자신과 마주했으리라. 똑같은 모습을 그리기 위해 관찰과 시간이 필요했을 작가는 어떤 모습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자기성찰적 태도 또한 필요했을 것 같다.

얼마 전 노들섬에서 자화상 그려주기클래스를 운영하는 작가님은 이런 말을 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오래 본 적이 없다.”

윤두서 역시 그랬을 것이다. 명문가 선비였던 그가 자신을 그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여느 조선의 사대부처럼 그도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앉으려고 했다. 이로인해 출세에 멀었던 자신의 환경이나 역모를 하였다는 모함을 받고 어쩌면 윤두서는 관직에 환멸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탕건이 잘려나간 듯한 작품을 보면 학문을 함에 있어 더는 관직에 뜻이 없다는 그의 심정이 그대로 작품 속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림 속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매서운 눈에서는 쉽게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과 기개, 그리고 수염 하나하나에도 털 하나 놓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그의 끈기와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경거망동하지 않는 신중함조차 느껴지는 윤두서의 자화상’.

옛 그림에서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을 전신사조라고 하였다. 그 대상의 정신을 전하기 위해서대상의 인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베껴 그리는 초상화. 윤두서의 이런 태도는 조선 영조 때 정상기(1678~1752)가 그린 동국여지도의 채색 필사본을 그려냄으로써 그 중요성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느꼈을 터였다.

있는 그대로를 똑같이 그린다는 것은 바로 윤두서 자신을 보여줘야 함을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대로의 자신을 그리며,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작품에 비친 그의 자화상은 마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한 듯 보였다. 마치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눈 밑 주름, 자국, 터럭 하나라도 틀리지 않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말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며 남편과 얘기를 나누었던 화장품 거울 속 나를 다시 바라본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나를 보이게 하는 것이 너무 많다.

플레스(Flex)한 세상, 나는 조금 작은 거울로 나를 들여다본다. 손바닥만 한 거울 속에 나로 꽉 차 있다. 됐다. 이것으로 만족한다. 나를 위한 세상, 나만의 자화상이 바로 이 거울 속에 있다.

강민지 커뮤니티 예술 교육가/국민대 회화전공 미술교육학 석사
강민지 커뮤니티 예술 교육가/국민대 회화전공 미술교육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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