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경의 이슈메이커 25

사진출처 네이버
사진출처 네이버

땅이 흔들린다. 내가 흔들리는 것인지도 모른 체 우스꽝스럽다. 신입생인 우리를 환대하는 선배들의 환영식은 거창하다. 늘어선 말통에 가득한 막걸리에서 그들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사발 그릇에 꽉꽉 눌러 담은 막걸리가 파도를 타듯 내게로 온다. 슬쩍 요령을 피우면 내 옆에 친구들이 그만큼 더 마셔야 한다. 일종의 동기애를 테스트하는 절차이다. 요란한 신고식을 마칠 때 즈음, 하나둘씩 쓰러져간다. 하늘이 뱅뱅 도는 기분이 영판 이상하다. 술에 취한 동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평소 얌전한 성격의 그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취기에 없던 용기가 생기는 모양이다. 속엣말도 거침없다. 취중에 무천자(舞天子)라 하지 않던가.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렇게 시작된 술은 사회생활의 기본이다. 적당히 마실 줄 알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프로다. 노련한 스킬을 익히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부끄러운 흑역사를 기록하기도 한다. 테이블 아래 슬쩍 술 버리기. 멀쩡한 술잔이 깨진 척 빈 술잔으로 바꿔오기. 술 앞에 장사 없다고 필자는 제법 흥을 돋우면서도 절제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연마했다.

술이 마냥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맨 정신으로는 차마 하지 못하는 속내를 취중에 부서장께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 말이다. 취기는 그의 견고한 원칙을 허물기도 하고, 심지어 너그러운 포용력을 허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절제하지 못하고 인사불성 되는 이들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울 게 없다. 세상은 본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눈에 뵈는 게 없다. 또한 상습적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니 말이다. 안하무인으로 꺼떡대는 행태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리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모습에서 필자는 무언가에 취한 어떤 부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과도한 자기인식과 일방적인 태도. 마치 특권의식에 취한 이들과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이들은 나르시시즘 영역 내의 우월감과 자부심을 과도하게 드러낸다. 때문에 높은 수준의 우대를 바라며 오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필자의 눈에는 술에 취해 사장 나오라고 고함치는 고주망태나, 제멋에 취해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삿대질하는 들의 유행어가 똑같아 보이니 말이다.

미국 심리학자 Campbell에 의하면 특권의식은 자신이 받아야 할 특별한 대우나 보상에 대한 비이상적인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욕구와 관련된다고 하였다. 이들은 자기중심적 행동을 보이며, 조직 내에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의 문제점은 비윤리적 친()조직 행동을 보인다는 점이다. 즉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을 방패삼아 타인의 인권을 무시하고 비인격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용한 사무실. 정적을 깨는 전화벨이 울린다. 본인 할 말만 내뱉는 그는 애초에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쓰레기 버리듯 뱉어내고 끊었으니 속이 시원할까. 전화벨이 다시 울린다. 이번엔 전화를 먼저 끊었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 이제는 죄송합니다로 끝내지 않는다. 고해성사하듯 그에게 죄를 고백해야 끝이 난다. 그에게 상대방의 인권 따위는 중요치 않다.

직장에서 특권의식에 취한 사람은 마치 질량 보존 법칙처럼 일정량을 유지한다. 분명히 한 번은 마주친다는 말이다. 그들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거칠 것이 없다. 특권의식 또한 병리적인 특성임을 감안한다면 그도 그럴듯하다.

술 취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상대할 필요가 있는가? 상대해봐야 소용없다. 영원할 것 같은 특권도 언젠가는 끝나는 법. 그들의 삶은 허무로 가득하다. 특권에 대한 갈망은 커져만 가고, 혹여나 놓칠까 두렵다.

그러니 필자는 특권의식에 취한 사람을 구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길 바란다. 술에 취한 사람은 그 모양새를 보면 알 수 있다. 초점을 잃은 눈빛. 흔들리는 자태. 특권의식에 취한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내리깔린 시선. 거만한 걸음걸이.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건 성격상 어렵다. 그렇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술 취한 사람과 싸워봐야 나만 손해다. 비굴함을 느낄 필요 없다. 오히려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나 자신을 피폐하게만 할 뿐. 그들의 오만함은 끝이 없다. 그들에게 부딪치지 않으면서 피할 수 있는 요령은 얼마든지 터득하면 된다.

이전과 같은 상황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자. 전화기 너머까지 그의 거만함이 느껴진다.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화기를 내려놓을 필요 없다. 그저 수화기를 방치해두고 하던 일을 하면 그만이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취기에 사로잡힌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내 인생이 더 아깝지 않은가. 정신승리!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나 자신에게 있다.

 

참고문헌 1. 원종하, & 이은령. (2020). 조직지원인식과 비윤리적 친조직 행동에 있어서 심리적 특권의식의 조절효과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0(8), 598-617.

2. 황한솔, 김미희, & 신유형. (2019). 상사의 심리적 특권의식이 비인격적 감독을 통해 부하의 창의성에 미치는 영향과 부하 주도적 성격의 조절효과. 경영학연구, 48(6), 1569-1590.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