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경의 재미있는 이슈메이커-24

사진출처 네이버
사진출처 네이버

필자는 무심한 듯 유쾌하고 잔정 깊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또 한편으로는 냉정한 듯 허점 없이 똑 부러진 어머니를 닮았다. 영판 서로 다른 두 사람은 신기하게도 조화를 이루어 필자를 만들어냈다. 우직하게 앞만 보고 달리는 아버지와 작은 돈도 허투루 쓰는 일이 없는 어머니를 보고자란 필자는 영락없이 그들이다.

속 깊고 순수한 부모님은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었고 본인들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 그 이상을 욕심낸 적도 없었다. 검소하고 간결한 부모님 아래서 필자와 여동생은 절제된 생활에 익숙했다.

간만에 떠나는 가족여행. 매번 어머니는 새벽 댓바람부터 분주하다. 먼 길도 아닌데 무슨 짐이 그리도 많은지. 꼼꼼히 빠트린 것은 없는지 확인하는 손길이 혼잡하다. 혹여 차타고 가는 길에 출출할까 과일이며 고구마며 없는 게 없다. 목마르다 하면 가방 여기저기에서 물병이 나왔고, 배고프다 하면 떡을 꺼내주셨다. 어머니의 철저한 준비성 덕분에 우리는 생전 여행지에서 군것질거리를 사 먹어본 적이 없다.

하물며 언감생심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 필자와 여동생은 성인이 되고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준비했다. 바리바리 싸 들고 갈 순 없어도 철저한 준비성은 유전인건가. 첫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필자와 여동생은 식당부터 호텔까지 꼼꼼히 확인하며 여행사를 무던히도 귀찮게 했다.

빈틈없이 준비한 45일간의 태국여행은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가이드가 이끄는 데로 유명 여행지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맛집만 찾아 고른 식당에서 산해진미를 즐기며 난생처음 호사를 만끽했다. 필자에게 태국은 한운야학(閑雲野鶴), 고량진미(膏粱珍味) 가득한 추억으로 남았다.

두 번째 해외여행. 필자는 동생과 단둘이 1415일 유럽여행을 떠났다. 두려움 반, 설렘 반. 걱정과 달리 우리는 금세 이국적인 풍취와 화려한 건물들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아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한껏 꾸며 이색적인 매력을 뽐내는 유럽의 건축물들은 태국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마력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 단둘이서 해낸 해외여행은 짜릿한 성취감과 희열감마저 안겨주었다.

그리고 3년 후. 필자는 운 좋게도 미국 연수의 기회를 얻어 장장 2년간의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막막했다. 이번엔 두려움이 앞섰다. 제법 당찬 성격임에도 타지에서 홀로 살아가야 할 날들에 덜컥 겁이 났다. 잠시 머물러 즐기던 해외여행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로 근사하고 화려한 모습만 보여주던 것들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 이면에 숨어있는 불편한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세 시간을 기다려도 처리되지 않는 비자. 달러와 센트를 어렵게 구분하는 필자를 불편하게 내려다보는 마트 직원. 간신히 빌려 차에 달아놓은 내비게이션은 밤사이 누군가 차창을 깨고 훔쳐 갔다. 세계 최강국을 자랑하는 나라의 시민의식 수준에 실망감뿐이었다.

여행지에서는 적당히 말해도 알아듣던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어림없다. 꾸역꾸역 영어 단어를 찾아가며 말해봐야 귀찮을 뿐이다. 타지에서 몸소 느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필자의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융(C.G. Jung)은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양면적인 속성을 인간의 양가감정에 적용하였다. 인간의 의식적인 지각, 생각, 감정들로 이루어진 의식화 영역과 그 반대의 숨어있는 어두운 이면을 자아와 그림자로 설명하였다. 이 같은 양면성은 좋고 나쁨을 가르는 흑백 논리라기보다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공존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양면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아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으레 사람들은 첫인상을 중요시한다. 특히 첫 대면 자리에서 첫인상이 주는 영향력은 강력하다. 수려한 외모, 깔끔한 꾸밈새, 유창한 언변. 각자의 판단 기준에 따라 서로를 평가하고 호불호를 결정한다. 의식적으로 잘 갖춰진 외면은 자신의 밝은 면만을 과대 포장한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잠시 머무는 여행지가 아니기에 번지르르한 겉치레는 언젠가 들통나고 만다. 필자는 그럴듯한 첫인상에 속아 숨겨진 이면을 놓치고 깨진 차창처럼 산산 조각난 경험이 있다. 몇 번의 판단 미스 후 필자는 평가 기준에서 겉치레를 제외하였다. 한결같은 일관성, 가식적이지 않은 배려, 진실한 언행. 물론 첫인상에서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인생은 떠도는 여행이 아님을 알기에 표면적인 겉모습을 보는 동시에 내재된 그의 본질을 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1. 이영철. (2011). 내면과 외면: 비트겐슈타인의 심리철학. 철학, 109, 229-261.

2. 진교훈, & 윤영돈. (2003). 융 심리학의 인간학적 함의에 관한 연구.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유은경 사회과학 박사과정 중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