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병기는 쉬운 글자를 어렵게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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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병기는 쉬운 글자를 어렵게 만드는 일
  • 서산시대
  • 승인 2015.10.1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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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철 충남도교육감

시카고대학의 J.D 맥컬리 교수는 '한글날은 모든 언어학자들이 기념해야 할 경사스런 날'이라고 했다.

‘대지’를 쓴 미국의 여류작가 펄 벅은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살아있는 갈대’라는 작품 서문에서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이다. 24개의 부호가 조합될 때 인간의 목청에서 나오는 어떠한 소리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공연히 건드려서 걱정을 일으킬 때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을 쓴다. 하는 행동이나 말이 상황에 맞지 않고 매우 엉뚱할 때는 '생뚱맞다'고 말한다.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야말로 긁어 부스럼이고 생뚱맞기 그지없는 일이다.

교육부는 인문·사회적 소양을 함양하고 인성 교육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한자교육 활성화 방안을 내세웠다. 하지만 시대를 거스르고 국격을 낮추는 일이라는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학습부담을 줄이기 위한 문·이과 통합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 및 각론을 고시하면서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는 일 년 뒤로 결정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지 않고 한글 전용 교과서로 교육한 결과 단순 문맹률은 낮아졌으나, 글을 읽고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 문맹률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주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15세 미만 학생 대상 문해력 부문 세계 최고 수준으로 나타난 것을 볼 때 이는 근거 없는 말이다. 교육정책을 결정하는데 의견이 나뉘어 대립될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는 학생의 학습부담, 교사의 수업부담,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초등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게 되면 문장을 읽는 속도와 집중도가 낮아지고 수업 목표와 상관없는 한자 뜻풀이에 시간을 허비해 학습 내용이 부실해 질 수 있다.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는 한자 사교육을 받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의 선행학습의 차이가 학력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주사(注射) 맞던 날 <서재환>

예방(豫防) 주사(注射) 놓으려고/의사(醫師) 선생님이 들어오시자/왁자한 교실(敎室) 안이/금세(今歲) 꽁꽁 얼어붙고/차례(次例)를/기다리는 가슴이/콩닥콩닥 방아 찧는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한자 병기 후를 상상해 보았다. 시적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고 글맛을 느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낭독하는데도 영 거추장스럽다.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는 쉬운 글자를 어렵게 만드는 일이고, 소리글자를 뜻글자로 변질시키는 일이다. 또 한글이 우리말을 적는데, 부족한 글이라는 편견을 낳을 수 있다. 한자 병기는 세계 최고의 학습 부담에 시달리는 초등학생들에게 무거운 짐을 더 얹는 일이고, 한글의 가치를 실추시키는 무서운 병기가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라고 극찬한 한글날을 맞아,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는 연기가 아니라 폐기돼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오덕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본다.

"우리말, 우리글은 백두산보다도 금상산보다도 더 귀한 보배요, 바로 우리의 목숨입니다.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우리말을 살리는 일에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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