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은 전통한복의 자존심과 맥을 잇고 싶어서다

한복패션쇼는 한복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

고전을 디자인하는 전통한복 이남례 대표
고전을 디자인하는 전통한복 이남례 대표

프롤로그

지난 수요일, 서산시 동문동 이남례 전통한복연구소에서 만난 이남례 대표는 가을빛이 물씬 느껴지는 한복을 곱게 입고 아름다운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약속 시각보다 늦게 도착해 미안한 마음으로 부산스럽게 들어가 앉으니 아담한 연구소 한쪽에 한복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한복을 본 외신 기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바람을 담아낸 듯 자유와 기품을 한데 모은 옷이라 평하였는데 바람이 들어간 듯 봉긋한 치마를 보니 어쩌면 그 표현이 제대로 들어맞는 듯했다.

서산시대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1호 침선장 박광훈 선생의 14호 이수자인 이남례 대표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많은 분이 궁금해하고 있다

사랑은 미친 짓이라고 누가 그랬죠. 정말 한복에 미쳐 살았어요. 제대로 공부하려고 시간, 돈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했죠. 머리가 흔들리고 몸이 풀어질 만큼 힘든데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 와중에도 제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저의 노력과 운, 그리고 저를 도와주려는 사람, 이렇게 삼박자가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정말 세상 물정 전혀 모르고 한복에만 매달려 살아왔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이순(耳順)인 거 있죠.

공부도 하고 책도 쓰고 패션쇼, 전시회, 강의, 심사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지난번 스승님께서 제가 한 말이었다며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눈 안 팔고 한복만 했다. 열심히만 하면 뭔가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와 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제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아마도 열심히 해온 시간을 뒤로하고 무언가를 해보려고 눈을 들어보니 찬 바람이 불고 있는 한복업계의 현실을 본 거죠. 앞에서 혼자 고민하다 한숨처럼 내뱉은 말인 것 같아요.

Q 언제부터 한복에 발을 들여놓았나?

공직생활을 하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인 35세에 입문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육아에 전념하다 생활고 때문에 일을 해야 했는데 막상 뭘 해야 할지 막막했죠 고민하고 고민하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한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당한 인기를 누렸었지요. 저 또한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것은 한복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손바느질로만 한복을 만드는 이남례 대표
손바느질로 한복을 만드는 이남례 대표

Q 다른 것과 다르게 바느질이란 게 상당히 힘들었을 텐데?

동네 한복 기술자에게 바느질을 배웠는데 하지 않던 일을 하려니 여간 어렵지 않았어요. 아이들을 재워놓고 늦은 밤까지 바느질하다 졸음이 쏟아지는 통에 바늘에 찔리기도 여러번이었습니다. 그래도 한땀 한땀씩 정성으로 하다 보니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으로 올라가게 됐죠.

그때부터 삯바느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동부시장 한 코너에 작은 한복집을 열게 되면서부터 저의 삶이 새롭게 재단되었지요.

물론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것이 바느질이란 것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또 경제적으로 이어지니 자립할 수 있어 얼마나 좋았던지요.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바느질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가 됐다는 거예요. 손님이 오지 않는 날에도 혼자 앉아서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바느질을 했으니까요.

작은 한복점은 한두 분의 손님을 시작으로 바느질 잘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일거리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손님층도 다양해지고, 한복이 완성되면 한결같이 감탄하며 만족해하셨지요. 아마도 그것은 책임감도 한몫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목표를 세우면 최선을 다해 반드시 달성해내고야 말았던 성격 탓도 있었고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1호 침선장 박광훈 선생과 함께, 이남례 대표는 박광훈 선생의 제14호 이수자가 됐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1호 침선장 박광훈 선생과 함께, 이남례 대표는 박광훈 선생의 제14호 이수자가 됐다.

Q 늦은 나이에 일하면서 공부하기에는 많이 힘들었을 텐데 원하는 결과는 얻었나?

가게가 궤도에 오를 즈음 사회 전반적으로 한복이, 활동하기에 불편하고 패션 트렌드와 동떨어졌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자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한복이 되면 어쩌지하는 조바심과 함께 가슴 한쪽이 답답해 옴을 느꼈습니다. ‘좀 더 공부해서 제대로 된 한복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았던 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뒤져 성균관대학교 내 궁중복식연구원이라는 교육기관을 알게 되었지요. 그곳에는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신 유송옥 교수님께서 운영하고 계신 곳이었고, 성신여대에 개인 침선박물관을 가지고 계신 서울시 무형문화재 11호 박광훈 선생님을 비롯하여 매듭이나, 염색 등 전통복식 제작에 필요한 최고 전문가들이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그길로 연구원 문을 두드렸고, 그것이 그동안 굶주렸던 학구열에 기름을 부어주는 계기가 되었지요. 저 외에도 대부분 학생은 저처럼 자신들의 매장을 운영하거나 추후 매장을 운영하기 위한 분들이어서 배움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습니다.

먼 길 타고 올라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 포기할까도 싶은 날이 많았지요. 그래도 훗날을 위해 파김치가 되더라도 교실에 들어가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때는 또 그만큼 젊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대단한 시기였거든요.

힘든 여정이었지만 드디어 궁중복식연구원을 수료하고 서산문화원에서 이남례 첫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가슴이 말할 수 없이 벅찼죠. 이제 겨우 한 고개를 넘었지만, 또다시 배움의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이왕 배움의 길로 들어섰으니 부족한 부분을 더 배우자라며 무형문화재 박광훈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그분 밑에서 3년 동안 서산과 서울을 오가며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죠. 저는 그렇게 선생님의 제14호 이수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동안 배운 기량을 확인하고자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하여 2008년도 충남기능경기대회에서 금상을 받았고, 같은 해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는 동상을 받았지요. 그리고 2015년에는 제40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 이응해 단령으로 특선을 받았구요.

상을 받는데 그동안의 일들이 스쳐 지나가더군요. 종일 가게에서 일하다 배움의 끈을 놓지 못해 시작하게 된 늦깎이 학생, 울컥 눈물이 스치면서 그래 힘들었지만 잘 이겨냈어라고 스스로 칭찬도 해주었습니다(웃음).

돼지는 넘어져서야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했잖아요. 가계경제가 힘들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꿈꾸지 않는 상태로 세상을 살아갔을 거라 생각해요.

미국 어번대학교 Korea festival 한복 패션쇼
미국 어번대학교 Korea festival 한복 패션쇼 당시 재직 교수에게 홍곤룡포를 입히며

Q 국내를 이어 해외 6개국을 돌며 한복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는데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미국 어번대학교 ‘korea festival’에 초청을 받아 한복, 한지공예, 유리공예, 솟대 등 국내 다양한 분야의 공예가분들과 함께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해 힘을 모았던 일입니다. 패션쇼 때 쓸 많은 짐과 13시간의 장거리 비행으로 행사를 하기도 전에 저는 이미 애틀랜타공항 로비에서 녹초가 되어 버렸지요.

공항에서 2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작고 아담한 마을 어번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곳은 겨울이 시작됐던 쌀쌀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따뜻하고 포근했었지요. 피곤했는데도 왠지 기분은 묘하게 좋았습니다.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한복 패션쇼가 진행됐습니다. 홍곤룡포를 입으신 미국인 교수님 이하 다양한 한복을 입은 학생들 모두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무거운 가채 등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고도 불편한 기색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재미있게 진행해 주었지요.

쇼가 끝나자 쏟아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 쌓여있던 피로가 봄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어요. 얼마나 뿌듯하든지 그 순간만큼은 피곤도 잊고 하늘을 날 듯이 행복했습니다.

솔직히 이 모든 것들은 한복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등을 떠밀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지요.

해미읍성 전통 한복 패션쇼를 하며
해미읍성 전통 한복패션쇼를 하며

Q 지난해 해미읍성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다. 혹시 동기라도 있었나?

해미읍성은 제게 있어 아주 중요한 성지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어떻게 하면 해미읍성과 한복의 콜라보로 국내외에 알릴 수 있을까 하는게 늘 제 숙제였거든요.

사실 그 전, 미국에 갔을 때였어요. 한인협회에서 “이곳에 있는 아이들이 한복을 모르니 기회가 있으면 한복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그게 제 마음의 불씨를 댕긴 거죠. 저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럼 우리나라 아이들은? 서산이나 주변 지역의 아이들도 전통한복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점을 갖게 됐어요. 그것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마침 기회가 되어 우리 지역에서 전통한복의 우수성도 알릴 겸 패션쇼를 해미읍성에서 하게 된 겁니다.

패션쇼 당일,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막상 어둠이 내리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 불빛 아래 펼쳐지는 화려한 전통한복은 관객들의 넋을 빼앗고 말았죠.

무대에서의 시간은 불과 30분 정도였지만, 준비는 3~4개월은 족히 걸렸던, 실로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더구나 모델에서부터 헤어 메이크업 등 지인들의 협찬을 받아 진행할 수 있었고, 특히 모델은 전문가 외에도 나이에 맞는 지인을 섭외하거나 주변 지역의 학생, 어린이, 성인들을 출연시켜 지역 사람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때 행해진 행사는 문화의 얼이 살아 있는 해미읍성에서도 패션쇼는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아주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SNS만으로도 지구는 하나란 걸 경험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해미읍성을 방문하기 위해 한국에 여행 오는 패키지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전)고용노동부 이영주 장관님과 함께
(전)고용노동부 이영주 장관님과 함께

에필로그

이제는 전통한복의 자존심과 더불어 맥을 잇고 싶다는 이남례 대표는 “21세기의 한복은 전통의 아름다움은 지키되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착용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개성과 기품있는 옷을 제작해야 한다. 이것은 25년이 넘도록 전통복식을 배우고 익히면서 얻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복이 실생활에서 멀어진 지금, 그 가치와 우수성은 더 멀리 더 높게 알려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전통한복을 세계에 알리는 국위 선양에 일익을 담당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1600여 년간 이어진 고유한복의 전통성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백제의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세계에서 가장 길다. 그런데도 우리 것의 대표주자인 전통한복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부유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옷 한복, 그 속에 전통한복 고수 이남례 대표가 있어 그나마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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