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쌤의 미술 읽기-⑫

해골과 꽃다발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 (1599~1652) 작/캔버스에 유채/67 x 86cm/개인 소장
해골과 꽃다발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 (1599~1652) 작/캔버스에 유채/67 x 86cm/개인 소장

 

신라 시대 승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길이었다. 밤이 되어 바닷가 어느 토굴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깜깜한 동굴 속, 자다가 목이 너무 말라 물을 찾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물은 썩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원효는 자신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물이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구토하기 시작했다. ‘밤사이 그렇게 달콤했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악취가 나는 물이란 것인가!’ 그제야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함께 길을 떠났던 의상만 유학을 떠나고 자신은 다시 신라로 돌아가게 된다.

만약 이 일화를 담은 그림을 그린다면, 어떻게 표현할까? 해골의 썩은 물을 달콤함으로 포장해 깨달음을 얻는 그림을 그린다면 무엇과 함께 그릴까?

여기 깨달음을 주는 그림 해골과 꽃, 과일이 그려진 그림이 있다.

바니타스(vinitas) 정물화, vinitas의 어근은 van to empty(비다)van(empty)+ish(비게하다) vanish 사라지다, 소멸하다의 뜻을 담고 있다. 사라진다는 뜻은 죽음, 덧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허무주의 회화양식을 말한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 벨기에 북부에서 주로 유행했는데, 당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은 종교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내일의 삶이 보장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그림으로, 당시 화가들은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해 회개하라는 의미에서 꽃, 과일들과 해골이 함께 놓인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의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암호가 숨겨져 있는데, 그 방법으로는 과일이나 꽃, 음식들을 해골, 촛불, 깨진 술잔, 죽은 새들과 함께 배치해서 그려 넣었다. 이것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바로 유한한 삶, 인생의 덧없음, 허무함 같은 것으로, 인생에서 권력도 아름다움도 지식도 부귀영화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덧없음이었다. 그래서 바니타스 정물화는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삶의 현실 직시를 위한 죽음의 경고이기도 하다.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 그림 속에도 꽃, 담뱃대, 진주목걸이, 금화,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속 잔, 유리잔, , 시계들이 해골과 같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담배 대 밑의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 바니티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 해석하면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뜻으로 빼어난 지식과 부귀영화는 죽음 앞에서 한순간 피어나 꽃처럼 지고 마는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 가져오는 허무함은 삶의 의지를 상실하는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유한함에 대한 자각으로 영속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허무함이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로마에서 승리하는 장군이 행진할 때 노예를 시켜서 했던 말이다. 이 말의 뜻을 풀이하자면 바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하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간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라!

장군에게 죽음의 자각은 겸손이라는 깨달음을 가져온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아름다운 정물화는 영원히 그 순간을 간직하라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바니타스 정물화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뿐 아니라 풍요로움 속에서 유한함을 느껴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이 있다. 원효대사가 해골에서 깨달음을 얻었듯 말이다. 이것은 곧 우리 인생에서 꼭 필요한 삶의 깨달음이 아닐까.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이 있다. 코로나19로 일상의 안전이 위협받는 요즘 17세기 바니타스 정물화 그림을 보면서 21세기의 풍요로움 속 위기를 생각해 본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격상된 지금, 휴대폰·TV만 틀면 나오는 화려한 상품들과 먹음직스러운 음식들 등 광고 속 명품과 사치품들이 과연 이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유한함을 생각해 본다. 100세 시대를 꿈꾸며 더 오래 살고 싶지만, 인간의 생명은 바이러스라는 작은 존재 앞에 유한한 것임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특히 죽음의 공포를 가져오는 새로운 바이러스 앞에서…….

언제쯤, 백신이 개발될까? 21세기의 겸손함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안전한 생활이 아닐까. 메멘토 모리를 외치며 오늘 하루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보내기를 기원해본다.

강민지 커뮤니티 예술 교육가/국민대 회화전공 미술교육학 석사
강민지 커뮤니티 예술 교육가/국민대 회화전공 미술교육학 석사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