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줄 때... 가장 행복한 순간

“내 마지막 꿈, 이쁜 요양원 지어 부모님 모시는 것”

태안 씨사이드승마클럽 민인애 대표
태안 씨사이드승마클럽 민인애 대표

햇살이 무거운 더위를 몰고 온 9월 중순경, 사슴이 땅을 파는 달에 태어난 태안 씨사이드승마클럽민인애 대표. 기다림 끝에 얻은 첫딸이라 그녀의 아버지는 아기 이름을 사랑이 많으면서 늘 어진 인품으로 세상을 향해 당당히 살아라는 뜻으로 민인애라 이름 지었다.

서산시대는 태안에서 승마클럽을 운영하며 타인의 행복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민 대표를 만났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득함 너머로 흑백사진들이 하나하나 떠올려진다. 그 속에는 아픈 추억도 행복한 추억도 있을텐데 대표님의 어린 시절을 소환해 달라.

행복한 추억들 속에 작게나마 아팠고, 무서웠고, 외로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어린애가 무슨 외로움을 말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를 떠올려보면 알거다. 그때는 집집마다 형제들이 정말 많았다. 5남매는 기본이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집이 태반이었다.

나는 무남독녀로 8년을 지냈다. 말다툼이 일어나도 나는 늘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지만 외로움이 늘 가슴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8년을 지내다 어느날 남동생이 태어났다. 세상 모두를 얻는 듯한 기쁨이었다. 비록 8살 터울이지만 확실한 내편을 확보했다는 자신감? 뭐 그런 것들이 내면을 차지했던 것 같다.

무서운 아버지에게 혼이 나도 내 옆에는 어린 동생이 함께 있어 주었다. 아버지는 당시 서울 중앙공무원으로 일했는데 굉장히 바빴다. 어쩌다 시간이 나면 항상 신문만 봤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래서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에 비해 함경도 이북 분인 우리 엄마는 자식 먹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착하디착한 분이셨다. 아마도 엄마 나이 10살 때, 6.25 피난 도중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그때의 배고픈 기억때문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때 동생이 엄마 등에 업혀 배고프다며 칭얼댔고, 엄마 또한 배가 고팠지만 가던 길을 멈출 수가 없었으리라. 등에 업힌 동생이 소변을 얼마나 눴는지 당신 등이 모두 까졌음에도 끝없이 걸었다는 우리 엄마. 그래서 배를 굶는다는 건 당신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2박 3일 여행지에서
아버지와 2박 3일 여행지에서

학창시절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정말 우리 엄마를 떠올리면 늘 울컥 눈물이 난다.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였지만 내가 옳다는 것은 당당히 주장했고, 이런 나를 보며 엄마는 노심초사하여 곁눈질로 자제시키곤 했다.

이런 내 성격이 어딜 가겠는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가끔 학교에 오는 날이 있었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정말 예뻤다. 엄마가 학교에 오는 날이면 친구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고, 학교 선생님들조차도 나를 달리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우쭐해 하면서 복도를 걷곤 했는데, 그때 내 마음 속에는 봐라 우리 엄마 이렇게 예쁘다는 뜻이 담긴 걸음이었다.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올 때마다 유리병에 담긴 델몬트 주스를 사오며 선생님께 드리라고 내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선생님 대신 반 친구들에게 전부 나눠주며 먹어버렸다. 이처럼 엄마와 나는 아버지완 반대로 사람을 아주 좋아해서 무한정 퍼주는 것을 좋아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어릴 적 봤던 우리 아버지는 늘 무섭고 바쁘고 활자만 좋아하는 분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3년 전, 내 몸이 갑자기 좋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돌아보니 아버지와 여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알았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내가 어른이 되고부터는 친구같고 애인같고 그냥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우리 아버지인데 말이다.

23일 아버지와 단 둘이 여행을 갔다. 그토록 거인처럼 무섭고 커 보이던 아버지 모습이 왜 그렇게 작아 보이던지. 더 나이 드시기 전에 가끔씩이라도 모시고 다니며 어릴 적 못다한 추억을 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훗날 그래야 덜 후회될 것 같아서 말이다.

말이 행복해서 웃는 모습
말이 행복해서 웃는 모습

성장하면서 당당한 모습들이 지금의 씨사이드승마클럽 대표와 많이 닮아있다. 태안에서 클럽을 운영하게 된 계기라도 있나?

우연한 기회에 승마 체험을 하게 됐다. 50분을 탔는데 그날 얼마나 운동효과가 좋았던지 글쎄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뻐근하더라. 그렇게 두 달을 탔다. 세상에 할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싱그러운 풀내음을 맡으며 말을 타고 걸어가는 느낌은 마치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서 내 속의 모든 정신적인 아픔이 순간에 날아가는 듯 했다. 또한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인 비만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단 걸 깨달았다. 이 지구상에 있는 운동 중 내장을 완벽하게 털어주는 운동이 바로 승마라면 이해가 갈까.

남편에게 승마장을 차려야 될 것 같다고 말했는데, 말리지는 않고 선뜻 그러자고 했다. 내가 만약 승마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2018년 충남도민체전 당시 승마 대회 참가 선수들과 함께
2018년 충남도민체전 당시 승마 대회 참가 선수들과 함께

2018년 충남도민체전 당시 전시 종목인 승마를 씨사이드승마클럽에서 치렀다. 역사상 최초로 태안에서 4위를 했는데 그때 얘기를 해 달라.

승마 한가지 종목으로만 봤을 때 우리 지역은 한참 신참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상태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였다. 또한 여기에는 운칠기삼이라고 솔직히 운도 따랐던 것 같다. 덕분에 4위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대회는 해야 하는데 갑자기 여자 릴레이 기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때 아무도 나서지 않자 누군가가 나보고 승마장을 하니 출전하라고 했다. 사실 승마장에는 오시는 손님들 위주로 말을 태우다보니 주인이라고, 감히 내가 타겠다고 교관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미안하다. 그래서 평소에도 자주 말을 타진 않는다.

그런데 나보고 직접 투입되어 달라니 어쩌겠나. 잘 달리는 말들은 다른 선수들에게 양보하고 나는 그중에서도 나름 신참인 말 위에 올라탔다. 그때 신기한 일이 있어났다. 자신도 신참인 우리 아이()가 신참인 주인을 알아봐주더라(웃음).

릴레이를 하는 도중 굉장히 무서워하는 주인의 마음을 어찌 알고 나에게 스텝을 맞춰주며 달리더라. 한마디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챙기며 공감을 이어갔다. 덕분에 두려움은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완주할 때까지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끝나고 난 뒤에 너무 기특해서 한참을, 하늘을 보며 웃었다. 내 실력에 교감이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결과를 낼 수 있었겠나. 지금 생각해도 기분 좋은 추억이다.

이 기운을 몰아 2019년 생활체전에서는 태안이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내가 사랑하는, 자식같은 보배들
내가 사랑하는, 자식같은 보배들

말을 사육하다보면 가슴 아픈 일도 있었을 텐데 혹시 그런 경험도 있나?

아끼는 말이 산통으로 죽었다.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간 사이에 직원이 연락을 해왔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기억도 안 난다. 말이 누워 있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울고 교관도 울고. 그렇게 그 아이()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말의 산통이란 급작스럽게 장이 원활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나타나는 병인데, 또 다른 말로는 배아리라고 한다. 거의 100% 인재다. 그날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아 운동을 적게 시켰던 것이 원인이었다.

한 아이()를 보내고 나니 그때부터 죽으면 안된다는 트라우마에 빠졌다. 그날부터 급식에서 운동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플랜으로 관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때론 말들이 기분 좋아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준다. 이때가 내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모든 시름이 풀린다.

‘나눔리더 인증패’를 수여받고 있다.
‘나눔리더 인증패’를 수여받고 있다.

이것은 승마랑 좀 다른 질문이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입구에 나눔리더 인증패라는 팻말을 봤다. 뭔가?

1년 동안 100만 원 이상을 기부하면 충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나눔리더 인증패를 주는데 태안군에서는 내가 첫 나눔리더가 됐다.

사실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남편의 영향이 크다. 충남 아너 소사이어티회원인 남편(국제로타리클럽 3620지구 김종언 총재진양건설 대표)의 영향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운동을 하는 청소년과 소년·소녀가장 등 지역사회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돕는데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나눔리더도 될 수 있었다.

가만보면 지갑에 돈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이웃을 위해 지갑을 열 줄 아는 사람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힘들게 번 돈으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만큼 값진 것이 또 있을까. 나눔은 곧 상대가 행복한 것 보다 내가 더 행복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가정이, 나아가 우리 고장이, 대한민국이 행복해지려면 기부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긴데 금전적인 기부도 좋지만 봉사활동 또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빠른 걸음인 것 같다. 내가 사는 태안에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다. 해마다 여름이면 전국에서 인파들이 몰려와 해수욕을 즐기는데 늘 사고에 노출되어 있어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안되겠다 싶어 인명구조자격증과 재난안전관리사자격증 등을 취득해 여름철 해수욕장에서 피서객들의 안전을 위해 봉사활동을 해 오고 있다.

여름이면 승마클럽도 챙겨야 하고 바닷가 봉사도 나가야 하고, 이때가 가장 바쁜 철이기도 하다.

남편 김종언 총재(국제로타리 3620지구)와 민인애 대표
남편 김종언 총재(국제로타리 3620지구)와 민인애 대표

마지막으로 꿈이 있다면?

시어머니가 치매다. 시아버님이 케어를 해주시는데 남편과 나는 아침저녁으로 들린다. 뵐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가까이서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도 여건이 맞지 않아 고민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우리 클럽 언덕에서 바라보면 바로 앞으로 바다가 보인다. 이곳에 요양원을 짓고 싶다. 최고의 입주조건이 될 것 같다. 이런 곳에서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다.

훗날 아주 나중 어느날 나를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내 눈앞에서 우리 부모님들을 볼 수 있도록 소담스럽고 이쁜 요양원을 짓고 싶다.

그리 크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양질의 환경으로 내 지인의 부모님, 내 친구의 부모님, 종단에는 남편과 나도 그렇게 이곳에서 늙어갔으면 좋겠다. 좋은 분들과 부모님들이 함께 어울려 행복한 삶을 누렸으면 참 좋겠다.

한결로타리 민인애 회장과 회원들
한결로타리 민인애 회장과 회원들

인터뷰를 마치며

늘 행복해지고 싶었다는 민인애 대표. 봄꽃이 지고 여름꽃이 필 때쯤이면 또다시 바빠질 것 같다는 민인애 대표.

그녀는 어수선하고 힘든 4월이 하루바삐 지나 5월이 오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행복해져 있을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사그락사그락 마음의 위로가 들리는 꽃비 내리는 봄에 서산시대는 태안 씨사이드승마클럽민인애 대표의 꿈이 이뤄지길 소망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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