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총선 기획시리즈】대한민국 국회를 가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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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총선 기획시리즈】대한민국 국회를 가다⑤
  • 박두웅
  • 승인 2020.04.05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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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국회, 개헌논의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잇달아
제10대 국회 해산, 10·26사태와 함께 ‘유신체제 종말’
개헌논의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보도기사
개헌논의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보도기사

 

9. 9대 국회 (1973.03.12~1979.03.11)

유신헌법에 따라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가 새로이 구성되었다.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의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은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 후보자를 대상으로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되었다.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의 임기는 3년이며, 198010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와 함께 해체되었다.

 

긴급조치와 민주회복국민회의

 

19738월부터 야당과 재야 및 학생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더욱 확산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418일과 113일에 헌법비방과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 및 3호를 연속적으로 발동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은 1114일 개헌 추진의 원외투쟁을 선언, 현역의원들이 가두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125일 국회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는 등 개헌투쟁의 강도를 높여갔다. 재야도 1225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고 개헌서명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범국민적 개헌투쟁이 가열될 조짐을 보이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5212일 유신헌법 찬반 및 대통령 신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개헌논의를 봉쇄하고, 513일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였다. 그러나 197631일 재야는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 및 긴급조치의 폐지, 유신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회복의 열망을 지속시키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10. 10대 국회 (1979.03.12~1980.10.27)

19781212일 제10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32.8%를 득표하여 31.7%를 얻은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앞섰다. 그러나 정당별 의석수는 민주공화당 68, 신민당 61, 민주통일당 3, 무소속 22, 유신정우회 77석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선거 득표율에서 앞선 신민당이 전체의석의 3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1선거구에서 2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와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선거제도 때문이다.

 

YH 사건. 1979년 8월 9일부터 11일 사이 가발수출업체인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강제 해산하면서 여공 1명이 추락사했다.
YH 사건. 1979년 8월 9일부터 11일 사이 가발수출업체인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강제 해산하면서 여공 1명이 추락사했다.

 

신민당 총재의 의원제명

 

1979811일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이던 YH여공들을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발생된 YH사건은 정치문제로 비화되었고,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1979104일 여당은 야당이 점거·농성중인 본회의장을 피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 발언내용을 문제 삼아 의원제명을 국회별실에서 의결하였다.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한 1979년 10월 총을 든 계엄군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부산 시내를 이동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한 1979년 10월. 시위대 모습. 이에 무장한 계엄군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부산 시내에 진입했다.

 

8차 개헌과 국가보위입법회의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긴급조치 해제 등으로 유신헌법 개정 여론이 비등해지자 국회와 정부는 각기 개헌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5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모든 개헌논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19808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은 929일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간선제와 7년 단임의 대통령임기를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고, 이 개정안은 1022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다.

1027일 시행된 제8차 개정헌법에 의하여 제10대 국회가 해산되고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그 권한을 대행하였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대통령이 임명한 8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고, 11대 국회개원까지 156일 동안 215건의 안건을 접수하여 100% 가결하였다. 1981225일 민주정의당 전두환 후보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10·26사태와 함께 ‘유신체제 종말’
10·26사태와 함께 ‘유신체제 종말’
10.26 사건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부마항쟁

197910월 부산과 마산은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마치 805월의 광주를 예고하는 듯한 상황이 그 7개월 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78년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공화당보다 1.1%의 높은 득표율을 보였고, 798YH 여공들의 신민당 당사 농성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소용돌이의 직접적 발단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 기사였다. 916일 뉴욕 타임스에 게재된 기사에서 김영삼은 이란에서의 재앙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의 실책에 의한 것이며, 한국에서 주한 미국대사관이 유사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정부·여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104일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정치적 파장이 커지자 미국은 106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소환하였고, 1013일 신민당에서는 의원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 상황에서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민들이 김영삼 총재 제명 반대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1016일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18일과 19일 마산과 창원으로 확대되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18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20일에는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시위는 진정된 것으로 보였지만, 실은 부산과 마산의 민주화 시위는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한 방법을 둘러싸고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 경호실장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이것이 10·26 사건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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