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 君子三變 · 君子不器

“재경서산시향우회를 소통과 협력의 장을 열어주는 플랫폼으로…”

 

재경서산시향우회 제25대 조한홍 회장
재경서산시향우회 제25대 조한홍 회장

#프롤로그

겨울 초입에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나 싶더니 어느덧 겨울 찬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이런 날은 ‘따뜻한 커피와 함께 좋은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나 나누면 딱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 기자 앞에 나타난 ‘재경서산시향우회’ 제25대 조한홍 회장.

고향을 찾은 그의 모습은 마치 연어가 물의 냄새를 기억하고 수만리 바다의 거센 물살을 헤치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고향 품에 안긴 그런 편안한 모습이었다. 기자가 미리 인터넷 이미지 검색에서 본 조 회장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 살짝 긴장했던 마음이 어느새 무장해제 되는 느낌이었다. ‘가까이 보니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구나!’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차 한 잔을 벗 삼아 재경서산시향우회 제25대 조한홍 회장의 살아온 삶과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 무학의 가난했던 부모님. 오로지 자식들 교육이 일생의 목표

안면도 창기리 김제라는 동네에서 가난한 집안의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난 조한홍 회장. 그의 부친(故 조영호)은 8살에 아버님을 잃고 형님 슬하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다 안면도 정당리 혜목 출신의 모친(김옥분)을 만나 결혼을 했고, 땅 두어 마지기를 받아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당시 ‘하꼬방’이라 불리던 작은 마트를 내어 장사를 시작했다.

“두 분 모두 무학이었지만 명석한 분들이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서당을 다니시며 글을 깨우쳐 야학을 가르치실 정도였고, 어머님의 암산은 계산기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셨지요. 저희 부모님은 우리 자식들에게 늘 배워야 한다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조한홍 회장은 앞에 놓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당시를 회고 하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부친은 그곳에서 먹고 살만하게 자리를 잡았으나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고향을 뒤로 하고 서산으로 이사를 나왔다. 그때 그의 나이 11살, 부춘초등학교 4학년. 모든 게 낯설었지만 그래도 잘 적응했던 것 같았다고 한다.

“부모님은 서산 서부시장이 새로 생길 때 상가 하나를 분양 받아 아버지는 주로 옷을 떼다가 파셨고, 어머니는 어물전에서 꽁치, 동태를 파시면서 어렵게 생업을 이어나가셨죠. 그 후 화장품 대리점을 내어 외판업을 하셨는데 브랜드가 별로여서 매출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라며 미소를 지었다.

TV도 없던 그 시절, 세상물정 모르던 시골 학생이었던 그는 학교 갔다 오면 숙제만 마치고 밖에 나가 놀기에 바빴다고 한다. 당시 서산중학교에서 영재 소리를 듣던 그의 형(조한정)은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법대에 진학을 했다.

 

# 형님에게 들은 세상 이야기에 눈을 뜨게 된 후 학교를 휴학하고 암자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 조 회장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 형님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와 과외를 시작했고, 조 회장은 자연스레 형님에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에 번개가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그는 ‘이렇게 살다가는 서울에 있는 대학이나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온전히 자신을 되돌아봤다고 한다.

‘이러면 안되겠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일단 국·영·수만 파자!’라고 생각한 그는 부모님께 휴학 얘기를 어렵게 꺼내며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말했단다.

“고2 학생이 공부를 한답시고 휴학을 한다 하니 어떤 부모님인들 허락하시겠어요? 당연히 반대하셨죠. 저는 등교를 하지 않고 지금의 호수공원인 ‘똥방죽’에 앉아 낚시를 하며 버티기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저희 부모님도 저를 이기지 못하고 휴학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는 그길로 태안 백화산 아래 냉장골에 있는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당시는 속된말로 사전을 뜯어서 씹어 먹을 때였잖습니까?(웃음). 정말 그곳에서 굴을 파는 두더지 마냥 국·영·수만 죽도록 팠습니다.”

군대시절 (요즘 아이돌 뺨치는 모습)
군대시절 (요즘 아이돌 뺨치는 모습)

# 고려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가정형편상 휴학하고 서산에 내려와 다방에서 일하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서령고등학교에 다시 복학을 했고 그 해, 전교 1등을 해 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전설적인 이력으로 인해 당시 서령고에서는 무슨 바람 같은 것이 불었다고 한다.

“유급하는 동기들이 잔뜩 생겨버렸어요(웃음). 바로 휴학 바람이었죠. 현재 모임 하는 친구 9명 중에서 정상 졸업한 친구는 딱 3명뿐이니....”

그토록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 해 조한홍 회장은 대학에 낙방하는 고배를 마셨고, 다음해 봄, 드디어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하였다.

“기쁨 뒤에 오는 아픔은 뭔지.... 당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급속도로 어려워져 등록금 낼 돈이 없었습니다. 죽으란 법은 없나 봅니다. 고민하고 있던 차, 아버지 지인 분께서 ‘어렵게 좋은 대학에 합격했는데 아깝다’며 등록금을 내 주셨죠. 저에겐 잊지 못할 은인이십니다. 그 즉시 바로 휴학을 하고 서산으로 내려와 다방에서 커피도 끓여주고 카세트테이프도 틀어주는 일명 ‘바리스타 & DJ’ 일을 하게 되었죠(웃음).

그리고 1년 후 군대를 갔고 다시 제대하여 또 6개월간 다방에서 주방 일을 하며 학비를 모아 그 다음해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고려대 정문을 밟게 되었습니다. 정말 천신만고 끝에 간 셈이죠.”

조 회장이 그때 일을 얘기하는 사이 창밖으로 내리던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앞에 놓은 커피는 식어 있었다.

어머님 85세 생신날 가족들과 함께
어머님 84세 생신날 가족들과 함께

# 가난 덕분에 학적조회까지 당한(?) 조 회장,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가족 간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졌다.

 

부모님은 정말 열심히 일하셨지만 모이는 돈 한푼 없이 어려움은 계속 이어졌고, 궁여지책으로 빌린 일수 돈 이자가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 결국 그의 집은 파산을 맞고 말았다.

“그때 형님은 행정고시 1차에 합격을 했고 2차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는데 집안이 어렵다보니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런 열악한 환경하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연세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한 넷째(조한기: 前 청와대 제1부속실 비서관, 現 더불어민주당서산태안 지역위원장 직무대행 및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전략기획위원회 위원)가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기소유예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고문후유증으로 얼굴에 구안와사가 왔고 지금도 피곤할 때는 얼굴 한쪽이 굳어지는지 가끔 손으로 얼굴마사지를 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짠해지곤 합니다.”

그는 한동안 짧은 침묵으로 담담히 당시를 회상했다. 인터뷰를 하던 기자의 입에서도 잠시 안타까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형님 회사에서 사택을 내준 덕에 우리 열 식구는 그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늘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지요. 어쩌면 그때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것들이 가족 간의 사랑을 더욱 단단히 묶어 주었던 것 같아요. 물론 나중에 형님과 제가 번 돈으로 부모님의 남은 빚은 모두 갚아 드렸구요.”

남들보다 3년 늦게 대학을 졸업한 조한홍 회장, 참고로 그는 입학하자마자 곧 휴학을 하였고, 군대를 복무한 후 복학을 한지라 대학 생활 동안 동기들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하고 졸업을 했다고 한다.

훗날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신정아 사건이 터지면서 오죽했으면 동기생 중 한 명이 “학창시절 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혹시 너도 가짜 졸업생인가 하여 몰래 학적 조회를 해봤다. 그런데 있더라. 우리 동기들 중에 제일 늦게 졸업을 했던데?” 라고 웃으면서 말했단다.

그랬던 조 회장이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81학번 동기회장과 경영대학의 80학번부터 89학번까지의 회장단 모임인 고대경영 809모임의 회장까지 역임했다하니 그의 활약상과 리더십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 30여 년 ‘금융업계 레전드’ 조한홍 회장

 

그가 잡은 첫 직장은 럭키증권(LG증권, 우리투자증권을 거쳐 지금은 NH투자증권) 이었는데 그곳에서 2년 반 근무한 신참에게 ‘대리 2년차를 주겠다’는 타 증권사의 스카웃 제의에 직장을 옮겨 채권 영업 업무를 맡았다. 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어쩌면 그동안 힘겨웠던 시간들의 보상을 한꺼번에 다 받았던 것 같았다”고 말하는 조한홍 회장.

그때부터 승승장구하여 미래에셋증권 사장을 거쳐 미래에셋생명 사장을 역임하는 등 그는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업계 최고의 영업맨으로 활약했다.

“제가 채권 쪽 일을 할 때 우리나라에 IMF가 터졌습니다. 증권회사의 대부분의 영업 파트가 엄청나게 힘든 상황을 겪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채권업계만은 금리수준이 높다 보니 호황이었고, 우리 팀이 회사 전체를 먹여 살릴 정도의 수익을 올렸었죠. 우리 팀원들은 남들 몰래 화장실에 가서 웃을 정도로 엄청난 수익을 창출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IMF를 거치면서 저희 팀은 어느새 대한민국 최고의 채권 영업팀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레전드였지요(웃음).”

기자는 궁금하여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으니 월급도 무진장 많았겠다”고 묻자 조 회장은 “그때만 해도 인센티브 시스템이 없어 조금 생색만 내주는 정도였다”고 손을 저었다.

치열한 전쟁터와도 같은 영업현장에서도 매 시간 팀원들과 하나 되어 즐겼던 조 회장. 지금은 사정상 현업에서 벗어나 잠시 휴지기를 갖고 있지만 그의 화려한 컴백을 기대해 보는 건 기자의 욕심일까?

 

# 퇴직 후 적극적으로 재경 일에 참여.... 선·후배 대화는 인생의 좌표가 될 수도

 

2017년 조한홍 회장은 정들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재경서산향우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기자는 철없는 질문이지만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럼에도 유난히 강한 회장님의 애향심은 어디서 나오냐?”고 물었더니 그는 “어머니”라고 대답했다.

“저희 형제들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까운 곳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뵈면 늘 고향을 먼저 떠올리곤 하지요. 더구나 고향 떠난 사람은 고향의 의미가 남다르기도 하구요. 그러다 보니 향우회 일이라면 적극적이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전임 회장님들을 모시고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 선후배들과 다양한 모임을 가져왔고 그중에서도 서령고등학교 출신 고려대학교 후배들을 데리고 학교로 내려가 선·후배 대화를 하곤 했어요. 선배의 한마디가 인생의 좌표가 될 수도 있거든요. 토요 격주수업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지금은 못하고 있지만...” 조 회장은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재경서산시향우회가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장착해 나갈 것이다.

 

기자는 재경서산시향우회 조한홍 취임 회장에게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몇 가지 일들은 최선을 다해서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역대 회장님들께서 해왔던 것처럼 향우들 간에 상부상조와 친목도모를 더욱더 돈독히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경서산시향우회가 향우들 간의, 서산 시민들과 향우회 간의, 그리고 주변 향우회들 간의 소통과 협력의 장을 만들어 주는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장착시켜 나갈 예정임을 말씀 드립니다.

또 하나는 서산시의 발전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겠다는 말씀 꼭 전합니다. 어떤 역할이 필요하다면 힘 닿는 데까지 우리 재경에서 발 벗고 나설 생각입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정도는 향우회 차원의 골프대회를 개최해 보려고 합니다. 현재 재경서산시산악회는 워낙 잘 되고 있습니다. 산악회와 더불어 대중화된 골프를 통해서도 향우들 간의 친밀감을 돈독히 해보고 싶습니다. (현재 그는 서령중고등학교 총동문 골프회 회장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고 또 할 예정입니다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재경서산시 향우회라는 플랫폼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회장단과 사무국이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필로그

 

논어에 나오는 ‘군자삼변 군자불기(君子三變  君子不器)’ 이 말은 재경향우회 조한홍 회장의 카톡에 쓰여 있는 말인데 “어떤 뜻으로 이 말을 올려놓았냐?”고 기자가 물었다.

“요즘 리더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생각하여 카톡의 상태메세지로 올려놓고 있습니다. <군자삼변>이란 ‘멀리서 바라보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엄숙한 모습을 가진 사람. 가까이 대하면 대할수록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람.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이 세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는 뜻입니다.

<군자불기>란 ‘군자(리더)는 일정한 용도로만 쓰이는 그릇과 같이 편협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알고 종합적인 지식과 실력을 가진 통섭(統攝)형 인간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일 할 때는 개인 사견보다는 논리에 맞게 합당한 의미를 생각하여 무엇보다 매사 엄정하게 일처리를 해왔습니다. 앞으로 재경서산시향우회장으로서도 특정 지역이나 학교에 치우치지 않고 향우회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을 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재경서산시향우회 조 회장은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치며 이런 말을 남겼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덕에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과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최고의 재산이지요. 이 재산을 재경서산시향우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써 볼 생각입니다. 많은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풀을 베는 사람은 들판의 끝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 재경서산시향우회 제25대 조한홍 회장이 가장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서산시대는 그의 앞날에 응원의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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