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통한 서산지역 문화발전에 최선, 후학 보면 뿌듯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인터뷰에 응해준 정헌시(85) 서도회 회장은 ‘아쉽다’는 말부터 먼저 꺼냈다. 지난 1983년 서산 관내 최초로 결성돼 지역 서예문화를 이끌어 오던 서도회가 최근 30년 역사를 접고, 휴면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정 회장을 비롯한 중심 회원들의 고령화가 주된 원인이지만 자신이 사고를 당한 후 활동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아쉬움과 함께 미안함도 크다.
정 회장과 서도회의 발자취는 그동안 고스란히 서산서예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해왔다. 배우지 못한 한이 컸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문교육을 받은 덕에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서예가가 될 수 있었다.
“어려서 접한 한문과 서예가 평생 동안 저와 함께했습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군대에서도 서무계에 배치돼 내내 글씨만 쓰다 제대했죠.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붓으로 행정서류를 만들고 차트도 만들었습니다.”
정 회장의 남다른 재능은 군 시절 이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닌 탓도 있었지만 워낙 출중한 한문 실력 탓에 선생님들이 물어볼 정도였다고.
직장도 용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학생들을 직접 교육하는 교사는 아니었지만 서무과에 근무하는 동안 각 학교 특활시간의 서예교육은 도맡아 해와 제자 아닌 제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20년 넘게 근무한 재직기간은 그의 서예인생에 있어서는 준비기간에 불과했다. 퇴직 후 보여준 발자취가 그만큼 대단했다. 서도회 결성과 비슷한 시기에 서예학원을 차린 후 본격적인 서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전국서예 휘호대회 최우수상(83), 평화통일예술제서예부분통일원장관상(84), 한국문화미술대전 최우수상(85) 등 각종 대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수많은 작품전과 지역 내의 각종 기념물에 휘호를 쓰며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우보 민태원 선생 청춘예찬시비, 무학대사 기념비, 일붕서경보대선사 서산번영시비, 진충사 정충신 장군 묘비, 전몰 경찰관 충혼탑 등 그의 손길이 닿은 곳곳의 흔적들이 그 증거로 남아있다. 그러나 정 회장을 지역을 대표하는 예술인으로 부르는 것은 비단 이 같은 업적과 성공에만 있지는 않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30년 넘게 서예학원을 운영해오며 지역의 서예활성화에 노력한 공로와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전시회, 서산시 600가구 가훈 써주기 등 서예를 통한 봉사와 지역발전에 노력한 점이 그를 더욱 빛나게 하는 진면목이다.
몸이 차츰 회복되면서 다시 붓을 잡고 있다는 정 회장은 “서예를 통해 지역의 문화진흥에 도움이 되고자 힘써 왔는데 혹시나 자만하거나 나태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며 “잠시 서도회가 휴식에 들어갔지만 그동안 배출해낸 수많은 후학들이 있어 서산지역 서예 분야의 전망은 밝다”고 말했다.
봄이 되면 다시 붓을 잡겠다는 노 서예가의 굳은 의지가 참으로 의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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