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국 백제, 대중국 전진기지는 닻개포구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잊힐지언정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백제사신길 따라 서산마애삼존불 등 불교유적 형성

▲ 서기 475년 한성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인 한성이 함락되면서 500여년의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겨 백제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웅진백제의 수도인 공산성.

1352년 전인 663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패한 백제 유민과 왜 연합군이 백제의 복원을 위해 백천강(지금의 금강 하구)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진 해상왕국. 최근 잊힌 백제가 천년의 긴 잠을 깨며 용트림을 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잊힐지언정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에 본지에서는 1500여 년 전 일본의 국보 칠지도를 제작한 철의 땅이며 한 때 백제의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서산지역 역사를 추적·추리해 보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본 기획은 ‘백제의 神검 칠지도를 찾아서-한성백제 편과 닻개백제사신행렬 역사문화탐방 프로그램 웅진백제 편’으로 구성되었다. 아쉬운 점은 승자의 기록 탓인지 학계의 백제역사에 대한 고증과 연구가 미천하다. 앞으로의 과제이지만 더 깊이 있는 기록은 후세에 맡긴다. - 편집자 주

본 백제역사 탐방은 서산시대와 함께하는 닻개문화제추진위원회(위원장 백승일)의 1500년 역사 발자취 '닻개백제사신행렬로를 따라서' 역사 문화 탐방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
닻개백제사신들이 걸었던 길을 다시 한 번 밟아본다는 소박한(?) 기획에서 출발하였지만 첫걸음부터 숨겨진 역사의 단서들이 얼굴을 내밀면서 ‘해상왕국 백제’의 형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하지만 역사추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길목마다 맥이 끊어지고, 백제역사연구에 대한 무관심이 ‘이 정도였구나’하는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서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지역 백제역사 연구는 황무지 그 자체였다.

▲ 백제시대의 대중국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한 닻개포구. 1970년 방조제 건설로 그 흔적은 사라지고 푯말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곳곳에 남아 있는 단서들은 해상왕국 백제 관문이었던 서산을 증명했다. 이번 탐방에는 닻개문화제추진위원회(회장 백승일) 주최·주관으로 서산향토사학가 이은우, 유충식 씨, 충남발전연구원 정종관 박사, 김영덕 서강대 명예교수, 충남예총 오태근 지회장이 참여했고 서산시, 서산시의회, 충청남도, 충남문화재단이 후원했다.
 
석남동, 성연면, 대산읍 등 구석기 유물 나와
지곡면에 부족국가인 치리국국(致利鞠國) 존재

▲ 부족국가시대 치리국국이 존재했던 서산시 지곡면. 백제시대 대중국 교류의 창구였으며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부성태수의 치소였다.

서산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올라간다. 기원전 1만년 경 끝난 서산지역의 구석기시대는 생각보다 훨씬 장기간 펼쳐졌다. 석남동 오목날 밀개 유적과 성연면 일남리 격지와 볼록날의 긁개 유적, 음암면 도당리 격지와 찌르개 유적, 그리고 대산읍 대로리 찍개와 밀개 유적 등이 그 증거로 채집되었다. 기원전 6천년 경부터 1천년 경에 진행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는 대산읍 웅도리 유두목 마을의 갈판과 갈돌 등이 태안군 고남리 패총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와 더불어 신석기문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농경의 비중이 높아지고 취락을 형성하며 생활의 광역화가 진행된 청동기대 유적은 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증가하며 모두 23곳에 달한다. 백제시대 서산지역에 존재했던 4개의 군현(郡縣)이 바로 청동기 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해미면 휴암리 유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형주거지로 10여 채의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다.
서력기원부터 서기 300년경까지를 부족국가 혹은 초기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 한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마한(馬韓)과, 각각 12개 소국으로 구성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이 있었다.
그중 현재 충남 서해안을 중심으로 치리국국(致利鞠國)은 서산의 지곡면 중심으로 태안에는 신소도국(臣蘇塗國), 당진에는 염로국(冉路國) 등 소국이 있었다. 당시 흔적으로는 지곡면 산성리 부성산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 부족국가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지명들, 즉 대궐재, 망군말, 둥령당이, 옥터밭, 왕산이, 쇠팽이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중 치리국국(致利鞠國)의 국명에서 ‘리국(利鞠’을 반절로 표기하면 ‘륙’이 되므로 ‘치리국’은 ‘치륙, 지륙(知六)’이 된다. 이는 백제의 지륙현(知六縣)이 되었고, 신라에는 지육(地育)으로 고려시대에는 지곡현(地谷縣), 즉 지금의 지곡면이라는 지명이 정해진 과정이다. 
당시 산업상을 보면 서산지역은 지곡일대를 중심으로 충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총 13곳의 야철지가 있어 고대로부터 대규모 철산지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지곡면지에 따르면 지곡면 무장리의 두모곡은 진시황 시기에 만리장성의 노역을 피해 연인(燕나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와 최초로 정착한 곳으로 그들은 자기가 살던 곳을 탁수(涿水)라고 하되 그대로 ‘탁’이라 하지 않고 도(道) 또는 두(豆)로 발음했다고 되어 있다.

▲ 백제시대 사철지였던 지곡면 일대. 고이왕 때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를 제작한 곳.

이는 무장리의 야철지가 있었던 ‘철장골’ 부근의 ‘탁’이라는 명칭이 진시황 시기의 야철장이었던 ‘탁씨(卓氏)’ 집단의 일파가 산동에서 배를 타고 서산의 무장리에 정착하여 철을 생산했다는 추정으로 한성백제시대 고이왕이 지곡에서 생산된 칠지도와 함께 ‘탁소(卓素)’라는 야철기술자를 일본에 보낸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3세기 말 고이왕 집권 서산 백제에 속하다
강력한 담로가 지배하던 지방세력 존재

한강유역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마한 54개 소국중 백제국(伯濟國)은 세력을 점차 확대 3세기말 고이왕(백제의 제8대 왕, 재위 234∼286) 시기에 이르러 마한을 완전 통합한다. 서산지역 소국들도 이 시기에 백제에 통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2004~5년 백제역사에 대해 놀랄만한 발굴이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서 있었다. 아파트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부장리 고분의 발견으로 고분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백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덤, 주거지 등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었다. 특히 5호분에는 공주지역에서 볼 수 있는 금동관모, 금동신발, 철제초두, 각종 구슬을 비롯하여 환두대도, 철검, 귀걸이, 각종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중 금동관모는 백제가 고구려를 제압한 최정점의 극성기였던 근초고왕 집권 시기로 당시 서산지역에 강력한 담로(믿을만한 왕족에서 임명) 또는 지방세력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서산이 중국으로 떠나는 수군의 발진기지로의 성격과 이 지역에서 산출되었던 사철과 소금들을 관리하였다는 곳이었다는 사실을 추정케 한다.
특히 지곡면 산성리 부성산성은 백제시대에 지륙현(知六縣)의 치소로 중국을 왕래하는 출발지로 지목되고 있다.

무녕왕, 음암지역 상노치성에 머물다
지곡 닻개포구 대중국 전진기지 역할

서기 475년 한성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은 전사하게 되었다. 개로왕의 동생 문주왕이 남쪽의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겨 백제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백제는 500여년의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웅진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지난달 18일 40여명으로 구성된 1차 탐방단은 웅진백제시대의 왕도 공주로 향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강으로 허리를 두른 공산성은 천혜의 요새. 조선시대에 돌을 쌓아 석성의 모습으로 변했다지만 왕도를 빼앗긴 백제로서는 다시 힘을 기를 수 있는 최적의 요새였다. 
이러한 웅진백제시대 서산지역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즉 한강유역의 한성이 함락되면서 서산지역은 고구려세력과 대치하는 접경지역이 된다. 
백제의 국제적 지위와 국력이 다시 강력해지는 무녕왕 12년(512년) 위천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했다는 기록과 서산지역의 많은 백제산성의 존재가 고구려에 대한 방어선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 웅진백제 무녕왕이 고구려군을 대파하기 위해 머물렀던 서산시 음암면 소재 상노치성. 토성의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음암면 상노치성 옛터를 찾았다. 토성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는 성곽을 끼고 농사를 짓고 있는 차명원 씨는 “예부터 우리 집을 성재(성안집)라 불렀다. 어린 시절 토성의 윤곽이 더 많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고 전했다. 이은우 향토사학자는 “무녕왕이 전투를 위해 이곳 상노치성에 머물렀으며, 위천은 바로 서산을 일컫는 지명”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더 이상의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에 탐방단은 섭섭함을 뒤로하고 곧바로 닻개포구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시 서산지역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중국과의 교류였기 때문이다.
백제의 웅진천도는 백제와 중국관계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목선을 이용한 뱃길은 황해를 횡단하는 루트가 아닌 연안을 따라 중국에 이르는 연안로였다. 사신들의 왕래도 매 한가지다.
부성산성 바로 아래 눈앞에 펼쳐진 닻개포구. 닻개포구는 1970년대 간척지 매립으로 이미 사라졌다. 이제는 포구의 흔적은 간데없고 갈대로 뒤 덮인 작은 천과 주변엔 논뿐이다.
빛바랜 푯말 하나만 덩그러니 서서 옛날 이 곳이 포구였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고 멀리 논 가운데 우뚝 선 여우섬만이 옛 바닷물이 드나들 던 곳이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마을 어르신의 말을 빌자면 어린시절만 해도 소나무에 밧줄을 맨 수많은 배들에서 젓갈과 소금, 땔감들이 싣고 내렸다고한다. 번성하던 주막들도 여러 곳이 운영되었다. 포구 입구 방조제의 거리는 약 600m로 닻개포구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번창했던 포구 맞은 편 주막간 거리도 눈짐작으로 300m은 족히 넘어 보였다.
닻개포구는 최치원이 당에 유학하고 돌아올 때 배를 정박했던 곳이며, 일제 강점기까지도 중국 상선들이 비단과 호염을  싣고 왕래하던 중국과의 교역항 역할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한강유역의 항로가 열리지만 최치원 부성태수의 치소를 부성산성에 두었던 까닭도 대중국 전진기지로서 닻개포구의 중요성이 통일신라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400여 년 전 역사 속에서 사라진 해상왕국 백제의 땅 서산.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21세기 서산은 대전-당진간 고속도로와 대산항 인입철도, 서산비행장 건립을 꿈꾸며 바다, 하늘, 땅을 아우르는 한반도 대중국 물류전진기지로 떠오르고 있다. 
해상왕국 백제의 관문이었던 ‘서산’. 백제가 중국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전진기지였던 닻개포구. 부성산성 발굴과 함께 언젠가는 복원해야 할 서산의 소중한 자산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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