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허당(聚虛堂) 한기홍의 서산갯마을

 

▲ 한기홍 향토사학자

② <조선시대에 있었던 운하개착의 역사>

-태조시대(1392~1398)

태조 4년에 경상도 조운선 16척의 난파사고로 인하여 지중추원사 최유경을 시켜 운하개착 가능지를 파악토록 명 하였으나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 공사가 어려움을 피력함으로 인하여 운하개착 공사에 돌입하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어서 남은에게 명하여 운하개착 가능지를 재차 탐색하게 하였으나 남은 역시도 땅 속의 돌로 인하여 공사가 불가능하다는 보고하기에 이른다. 이에 조정에서 굴포운하(堀浦運河)의 개착 여부를 논의하였으나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을 내고 태조시기에는 굴포운하(堀浦運河) 개착 공사를 진행하지 않는다.

-태종시대(1400~1418)

태종 3년에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함으로 인하여 경상도 조세를 남한강을 이용한 수운으로 변경 운영하던 중 하륜의 제안에 따라 고려말 왕강의 굴포운하(堀浦運河) 개착지 노선에 제방을 쌓아 인공저수지를 만들어 저수지와 저수지를 작은 배가 릴레이 하듯 세곡미를 운반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공사에 돌입하여 운하를 완성하였으나 저수지의 규모가 너무나 협소하여 작은 배조차도 운행하기 어려운 정도여서 완공은 하였으되 활용을 못하게 되어 태종은 이를 크게 책망하기에 이른다.

태종은 다시 박자청으로 하여금 굴포 현지를 돌아보고 공사의 가능여부를 파악해 보고할 것을 명해 박자청이 그림으로 그려 공사의 부당함을 보고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가부의 의견이 분분해 태종은 결정을 미루게 된다. 이후 태종이 직접 강무를 사유로 서산, 태안지역의 굴포를 순행하는 등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굴포운하(堀浦運河) 개착을 추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세조시대(1455~1468)

정유림이 전라도 조운선을 순성의 옛터에 정박하게 하여 조세미를 육로로 영풍창(永豊倉)까지 운송하고 영풍창(永豊倉)에서 다시 조운선에 옮겨 실어 한양으로 운송하는 방안을 제안하였으나 이러한 방식의 조운제도 운영여부는 명확치 않고, 세조 7년에 신숙주, 안철손 등을 보내 굴포운하(堀浦運河) 개착 편부를 살피게 하여 신숙주는 굴포운하(堀浦運河) 개착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이후 신숙주를 중심으로 공사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노선은 기존의 하륜에 의한 공사노선과는 다른 굴포운하 제2노선으로 태안군에 소재하는 남창포-하창-중창-상창-북창-북창포 노선이다.

그러나 3년간의 공사에도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조 10년 “물길이 바르지 않고 진흙이 물러서 파는대로 무너져 버린다”는 사유로 굴포운하(堀浦運河) 제2노선 개착공사는 중도에서 중단되기에 이른다.

-중종시대(1506~1544)

세조 이후로는 굴포운하(堀浦運河)의 개착지가 서산시와 태안군의 접경지역이 아니라 태안군 소원면의 의항 쪽으로 변경된다. 이는 안흥량(安興梁)의 전체지역을 피할 수는 없지만 관장목이라는 안흥량(安興梁)중 최고의 험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김전과 남곤의 건의로 기존의 굴포를 파는 것과 의항에 새로운 조거를 건설하는 것을 논의하여 결국 의항에 굴포를 팠다”

의항굴포는 중종 31년(1536년)에 5천명의 승려들을 강제 동원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의항굴포 역시도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견항(犬項)에 새로 수축한 제방이 얼마 안 되어 무너졌고, 의항(蟻項)의 굴착도 역시 메워졌으니 노역시킨 보람도 없고 수축시킨 명령도 허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나누어준 호패는 도망 다니는 도둑들의 기화가 되었으니 결국 중들만 이롭게 되었을 뿐 국가는 해만 입게 된 것입니다.』

의항굴포 개착의 실패는 모래지형 때문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구로 유명한 태안군 신두리 사구를 비롯하여 만리포 주변 일대가 모두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의항굴포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송정저수지로 넘어가는 무너미재로 알려져 있으나 필자가 몇 차려 현지를 답사해본 것으로는 무너미재에서 인공적으로 공사한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태안지역의 향토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며 파도리 쪽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어 지형상으로 무너미재보다 해발 고도가 훨씬 낮고 또 이 항로는 오직 관장목을 피하기 위함이므로 해발고도가 낮고 공사구간이 짧은 구간을 찾아 공사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하겠다.

-효종시대(1649~1659)

김육이 서산 태안의 경계지역에 운하를 파고 통주(通州)의 석갑(石閘)과 같은 갑문식 운하를 설치 운영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많은 신료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 대안으로 안면도와, 팔봉산 아래에 창고를 설치하고 이 구간을 육로로 운송하는 방안을 제기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는 김육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바 있어 이곳의 사정을 두루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특히 육지와 이어진 곶이었던 안면곶(安眠串)이 끊어져 안면도(安眠島)가 된 것도 김육과 연관되어 이루어진 역사(役事)이다.

안면도 외해를 돌아서 조운선이 운항하게 되면 안면도 신야리 앞바다의 쌀썩은여를 반드시 거쳐야 함으로, 앞에서 관장목을 피하기 위하여 의항굴포 개착이 있었듯이 신야리 쌀썩은여를 피하기 위해 안면도 굴포를 개착함으로써 안면도가 곶에서 섬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현종시대(1659~1674)

우암 송시열의 제안으로 굴포의 남쪽과 북쪽에 창고가 설치되어 운영되는 설창육수안이 받아들여져 운영된다. 남창은 천수만의 북쪽 끝단인 순제성 인근에 그리고 북창은 가로림만의 남쪽 끝단인 영풍창(永豊倉) 인근에 창고를 설치하고 이 구간을 우마차로 운반하는 것이다. 이를 안민창이라 하는데, 이 또한 오랜 세월 운영하지 못하고 폐단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중지되기에 이른다. 배에서 세곡미를 내려서 우마차로 남창과 북창사이를 운반하는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폐단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굴포운하(堀浦運河) 개착 오 백 여년의 역사를 통틀어 실제 운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간은 현종 때에 우암 송시열의 건의로 운영된 기간뿐이다. 오 백여 년을 계속해서 논의되었다는 것은 굴포운하(堀浦運河)가 가지는 중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안흥량(安興梁) 사 백 여리에 산재해 있는 조운로 상의 험로를 피하고자 굴포운하(堀浦運河) 제1노선과 굴포운하(堀浦運河) 제2노선, 의항굴포, 안면도굴포가 개착되기에 이르고 결국 최종적으로 안면도 굴포의 개착은 성공하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실패했을 정도로 지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힘든 공사였으며 국가적으로는 그만큼 중요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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