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 촌놈아! 이건 시가 아니야!”

▲ 김순일 시인

 

“야, 이 촌놈아! 이건 시가 아니야!”

“오지 서산 촌놈으로 태어나 문학을 섬기고 시를 위해 살고자 할 뿐....”

 

프롤로그

 

하얀 눈이 내린 듯, 이팜나무꽃이 만발한, 5월의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던 봄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 김순일 시인의 서재 우산재(愚山齎) 계단에도 초록 그늘이 시원함을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나라 문단에서 김순일 시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산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산사투리 등 서산의 토속적인 풍경, 서민의 애환을 맛깔 나는 시어로 풀어내는 김 시인의 시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김 시인은 1939년 서산출생으로 대전사범학교를 졸업, 1979년 현대시학에 ‘가을비’로 등단, 첫 시집으로 서산사투리’등 12권의 시집과 시선 집으로 ‘바보네 집 호박꽃’을 출간했다.

현재 서산 부춘동 자신의 집 문학사랑방(우산재)에서 여성문학회원들과 글공부를 하고 있으며, 월간 조선 문학에 시를 연재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시를 보고 ‘질박하다’라는 표현을 한다. 수수하고 꾸밈이 없다는 말이다.

살아가는 의미가 글을 쓰는 것이고, 앞으로도 민생들을 위한 글을 쓰겠다는 그는 오늘도 질박한 웃음을 흘리며 모든 인간의 행복을 위한 시를 빚고 있다.

- 김영선 기자

 

오지 서산 촌놈으로 태어나 자라다

 

나는 오지 중 오지인 서산에서도 안면도(현재 태안군)에서 태어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바닷바람 소리, 갈매기 떼 소리를 들으며 몸에 배도록 갯내음을 맡으며 가무잡잡 한 촌놈으로 자랐다.

지금은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2시간도 안 걸려 대전이나 서울에 갈 수 있지만, 내가 자라던 그 시절엔 온종일 터덜터덜 가야 했다.

서산은 그런 곳이었고, 같은 서산이라도 안면도는 또 달랐다. 반나절은 더 가야 하는 곳이었으니.......나와 ‘시(詩)’와의 관계도 그렇다.

문학이란 얘기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성장하면서도 ‘시’하고는 전혀 연줄이 닿아 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 쪽에서도 당연히 촌놈 중의 촌놈이었다.

내가 등단을 하고서도 어쩌다 대전이나 서울에라도 가는 날엔 농담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서산 촌놈 왔구먼”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잘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오자마자 책보를 집어던지고 동네 마당에서 공차기 등 놀기에 바빴고, 산이나 들로 다니며 거먹장아찌가 되어 살았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축구를 좋아하시던 담임선생님과 체육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만 나면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살았다.

6학년 때에는 학교 대표로 축구와 육상선수로 활약했고, 중, 고등학교 때도 축구 선수였다. 그러던 중 성장하는 과정에서 문학과 인연이 될 만한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6.25가 터졌는데, 그때 서울에서 태안으로 피난을 온 친구의 집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빌려다 읽은 일이 있었다. 이광수의 소설부터 임꺽정이니 하는 소설책을 등잔불 밑에서 콧구멍이 까매지도록 밤을 새워 읽기도 했다.

내가 어찌어찌하다 시를 쓰겠다고 할 무렵에서야, 어릴 때 가슴 밑바닥에 나도 모르게 뿌려진 그런 문학이란 작은 씨앗이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다.

팔 남매 맏이여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서산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사범학교로 진학을 했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전체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 본 병이 터져 공을 차기 시작했다. 우리 팀이 학교대표는 물론 충남 대표 팀으로 출전을 하면서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공부를 뒷전으로 공을 차기 시작할 무렵 시와 작은 연줄이 닿았는데, 국어와 서예를 지도하시던 한성기 선생님과 만남이었다.

국어 시간 중 시를 지도하실 때의 그 마력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성기 선생님은 국내 유명한 시인 중의 한 분이셨다. 그래도 그 때는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일이 없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할 무렵 ‘싸인장’이란 것이 유행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써서 되돌려 받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던 동기 친구들과의 이별의 아픔을 시의 형식을 빌어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이 ‘시’에 발이 잡혀 넘어가고 만 계기가 되었다.

 

시(詩)란 놈에게 발목이 잡히다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한 58년 4월 고향인 서산에서 인지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 선생님이 되었다.

눈망울이 소처럼 순한 아이들과 동심에 젖어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에 열정을 쏟았다. 책이 많지 않은 시대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무턱대고 읽고 생각나는 대로 써대고,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문학이란 놈이 특히 시란 놈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문학을 같이 얘기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냥 끙끙대기만 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교사들의 교수지침서인 ‘교육자료’에 ‘山’이란 제목의 시를 투고하였는데 그것이 게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라는 것이 어찌나 부끄럽다고 생각했는지.......그렇게 문학이란 병에 걸려 마음의 병이 깊어갈 무렵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군에 입대하면서 시란 놈을 떼어놓을 기회가 되었다. 강원도 화천 풍산리 깊은 산골에서 1년을 묻혀 살면서 시란 놈도 잊고 몸도 마음도 다시 건강을 되찾아 내 삶을 바꾸어 놓은 잊을 수 없는 군 복무 기간이었다.

 

다시 시(詩)와 함께 살다

 

군 제대 후 복직발령을 받고 일상생활로 돌아왔지만, 시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던 중 대학에 진학을 못 한 것이 한으로 박혀 있던 나는 서울 모 대학의 야간부에 적을 두고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 길을 바꾸기로 하고 독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중등학교 준교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 검정고시가 있었다. 지난날 문학에 뜻을 두었던 터라 ‘국어과’ 자격시험에 도전하여 국어과 중등학교 준교사 자격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부춘초등학교에 재직 중 지금의 아내와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기 위해서 사표(그 당시에는 같은 학교 남녀 교원의 교제가 죄악시되던 때였다)를 내고 중등학교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69년 해미중학교 강사로 임시 있다가 그해 당진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시하고는 어떤 끓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던지, 다시 시와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함께 살기 시작했다. 국어 선생이 되었으니 시를 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시(詩). 그녀와 함께 산으로 바다로 밀월도 하고 엎치락뒤치락 체위도 바꿔가며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다시 시작하였으니 이번에는 끝장을 보리라는 각오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봄날 내가 근무하는 음암중학교에 한성기 선생님께서 방문을 하게 되었다. 당시 교장선생님이 옛날 대전사범학교 동료 분이셔서 오신 것이었는데 너무나 반가웠다. 공주교대를 졸업한 선생님의 자제가 근흥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근흥에 살고 계신다고 하셨다.

 

야, 이 촌놈아 이건 시(詩)가 아니야

 

주말만 되면 근흥으로 한성기 선생님을 찾아갔다.

처음 어렵게 쓴 시라고 보여드렸는데 읽어보시고는 “야, 이 촌놈아 이건 시가 아니야” 하시며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오지 중의 오지 안면도에서 태어났고, 사범학교에 다니느라 3년을 대전에서 살았을 뿐 서산에서만 살아온 촌놈이었다.

그러니 내가 시라고 쓴 것들이 얼마나 촌스러웠겠는가. 어쨌든 주말마다 찾아갔다. 더러는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였지만 갈수록 더 엄하고 단호해지셨다. 시에 대한 지도를 처음으로 제대로 받아보는 시기였다.

한 해 두 해 머리를 끄덕이실 때가 많아지셨고, 그러기를 5년. 드디어 79년 ‘현대시학 6월호’에 초회 추천 작품이 실리게 되었다. 그동안 어둡기만 하던 하늘이 환하게 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또 2회 추천 완료 작품을 준비해야만 하였다. (당시는 2회 완료 추천을 받아야 등단이 되었다) 한 사람의 시인을 만들기 위해서 그만큼 철저하였다.

“뼈를 깎아라, 밤을 새워라” 하시던 말씀을 귀에 쟁쟁하게 들으며, 가슴 말리기 1년. ‘1980년 6월호’에 2회 완료 작품이 실리게 되었다.

그 후 현대시학 전봉건 주간께서는 이 서산 촌놈에게 과분할 정도로 작품 발표 기회를 주셨다. 특히 ‘서산사투리’ 특집과 ‘어둠 꽃’ 60편을 3회에 걸쳐 지면을 내주셨다.

이렇게 발표하는 작품들을 보시면서 한성기 선생님께서는 자주 서신을 주셨다. 작품이 수준에 떨어진다 싶으시면 죽비를 내리셨고, 더러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도 있으셨다.

“등단하였다고 자만하지 말아라. 계속 노력해서 더 좋은 시를 쓰도록 해야 한다”고 다잡으시며 담금질을 하셨다. 시를 쓰는 제자 한 사람이라도 반듯하게 키우려던 선생님의 은혜가 컸다는 것을 나이 먹을수록 생각이 난다. 생각은 하는데 나는 과연 그럴까?

 

▲ 김순일 시인의 서재 우산재(愚山齎) 전경

 

시(詩)와 함께 살며...

 

“야, 이 촌놈아 이건 시가 아니야”를 지금까지 되새기며 시를 쓰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어차피 촌놈이니 촌놈 시를 쓰려고 노력하였다.

멍청한 서산 촌놈의 시를.......서산의 산과 들판과 갯내 물씬 풍기는 바다와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서산 사람들이 살아가는 촌스러운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분, 서산마애여래삼존불님, 도시 깍쟁이가 몰려와도 넉넉하게 베풀며 살아가는 그분 같은 시를 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현대시학 ‘1983년 4월호’에 발표한 ‘서산사투리 17’이 ‘살아 있는 시들(김현 평선 홍성사 1983. 12)’에 실렸다. 촌놈인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는데, 어느 날 전봉건 선생님께서 축하한다며 전화를 주셨다. 그해 그런 서산의 마음을 묶어 ‘서산사투리 83’이라는 나의 첫 시집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나는 쉬는 날이면 서산 장터를 휘~이 들려오거나,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목로에 퍼질러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쪼들리면서도 열심히 땀 흘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으면서 세상에 대고 투덜대기만 하는 사람들보다 가난하지만, 정을 쏟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떨이하였다고 궁둥이 씰룩거리며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제자골목 아주메들. “떨이를 못 했으면 어떤가. 내일 또 나오면 되는 거지” 하며 제자골목에 비~잉 둘러앉아 막걸리 마시는 아주메 아저씨들, 그들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내 시의 뿌리는 노장이며 불교

 

나는 책을, 특히 시를 읽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많이 읽는다. 젊어서부터 노자, 장자를 좋아했고 불경을 많이 접했다. 내 시의 뿌리는 노장이며 불교이다.

아버지 직장에 따라 중 1학년 때 태안에서 서산으로 이사해 줄곧 서산에서 살면서 막걸리를 좋아했고 장터에 가면 톱 가는 사람, 배추, 무파는 사람들 모두 한데 어울리는 삶의 애환이 담긴 공간이었다. 서민의 애환이 담겨있어 좋아하게 되었고, 내 시의 주제가 되었다.

또 사람들의 웃음이 사라지는 게 싫어서 웃음을 찾아드리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시 제목을 ‘웃음을 돈 사려고’로 정했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 삶과 시를 재충전한다

 

좀 없고 부족해도 넉넉하게 살아가는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 꾀죄죄하지만 정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그들을 통해서 내 삶과 특히 내 시를 재충전하였다.

그런 서산장터 사람들의 꾸밈없는 삶을 담아 펴낸 시집이 ‘서산 장터 사람들’이다 나의 두 번째 시집이다.

나는 지금도 느리고 멍청한 서산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시를 계속 쓰며 살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다행히도 20여 평 서재를 얻어 시와 함께, 제자들과 함께하는 삶의 하루하루가 즐겁다. 그러면서 옛날 한성기 선생님께서 다그치고 담근도 주시던 그 배움대로 함께 공부하면서 또한 그들의 젊음을 받아 재충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삶인가?

“이 촌놈아 이건 시가 아니야!”를 가끔 꺼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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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일문일답 시간을 가졌다. 소탈하면서도 정성껏 답변에 응해 주신 김순일 시인님께 지면을 통해 다시 감사드린다. - 김영선 기자

 

▲ 매주 화요일 우산재에서 열리는 서산여성문학 회원들과 시 공부 시간.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글쓰기를 놓지 않을 것”

80세 생일쯤 2권의 시집을 내놓을 계획

 

Q. 서재의 이름이 우산재(愚山齋)인 까닭은?

 

당시 당진군 정미년 우산리(愚山里)라는 마을에 사는 교원 선배가 있었는데, 장날 송아지를 팔고 돌아가는 마을 어귀에 있는 주막을 모두 들리며 만나는 사람들과 술을 먹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해가 뉘엿뉘엿 져갈 때 주머니 속에는 동전 몇 닢만 둥글었다.

빈손으로 돌아가지만, 우산리 사람들은 오늘 하루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까짓 송아지야 또 한 마리 낳으면 되는 거지.......” 우산리에 사는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이 얼마나 사람 사는 이야기인가.... 너무 좋아서 아호를 우산재(愚山齋)라 지었다.

 

Q. '서산문학’ 동인지를 만든 까닭은?

 

1980년이었다. 모 일간지에 전국 시·군을 돌아가며 문학인 또는 문화인을 소개하는 기사가 있었다. 그런데 서산은 탤런트와 아나운서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가 등단한 직후이기도 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 서산에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동인지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1980년 ‘서산문학’을 조직하고 초대회장을 맡아 1990년에 처음으로 동인지 ‘서산문학’을 냈다.

 

Q. 요즘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은?

 

2002년 초 서산여성문학회를 창립하여 17년이 지났다. 회원 20여명을 등단시켰고, 현재 20여명이 매주 화요일에 모여 공부하고 있다. 열심히 고민하고 연구하여 인정받는 작가로 등단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10년을 공부해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야 등단을 한다는 원칙도 지킬 것이다. 회원들에게 항상 부탁하는 것은 겸손하라. 사물의 겉만 보지 말고 속을 보아라. 사물의 본질을 보려면 겸손(내려놓아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올 해 만으로 나이 80이 되었다. 가을쯤에 2권의 시집을 낼 생각이다. 나는 다작을 하는 편이다. 월간 조선 문학에 매월 5편씩 연재를 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하는 일이 있어야 행복하다. 젊어지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시대에 맞춰 변하려고 노력한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산악회에서 등산하고,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산을 다니며,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좋은 영감을 받는다. 나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글쓰기를 놓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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