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무길 문화서점 대표

 

나에게 서점은 삶인 동시에 역사!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그녀...나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어”

 

<대문을 열며>

한 낮에 쏟아지는 가을햇살을 등지고 열심히 카운터에 서서 계산을 하고 있는 문화서점 이무길 대표(59). 어린 시절에 대해 기자가 묻자 “부모님의 성화에 겨우겨우 눈 비비고 일어나는 시간이 아침 6시. 이미 두 분은 새벽에 일어나 분주히 움직이며 늦게 일어난 저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구하는 법이다’는 논리로 혼내셨습니다. 저는 날마다 혼나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식만큼은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당신들처럼 될까봐 미리부터 혹독한 훈련을 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 냄새 가득한 추억을 더듬으며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 이 대표. “제 나이 스무 살, 농사 지으라는 부모님 말씀에 열심히 논밭에 나가 일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를 뒤돌아 보니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마침 마늘장사 하는 분이 동네에 왔기에 그분에게 좀 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길로 오토바이 뒤에 몸을 싣고 무일푼으로 성연을 벗어나 서산으로 나왔어요. 그때부터 사촌형이 운영하는 요구르트 대리점에서 짐실이 자전거를 타고 새벽에는 유제품 배달을, 낮에는 서점에서 형님 일을 도왔습니다. 저녁에는 다시 새벽에 배달한 요구르트 수금을 했고요. 

그러기를 2년째 되던 어느 날, 그만 제가 다니던 서점이 부도가 났어요. 그때 외상으로 서점에 물건을 대주던 출판사들이 회의를 했나 봅니다. ‘우리가 넣어준 책값을 모조리 받아야겠다. 그러니 네가 장사를 해서 돈을 갚아라. 대신 책은 계속 납품해 주겠다.’ 그때부터 우유 배달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서점에 매달렸습니다.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6시 30분에 (서점)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았어요. 그리고 다시 새벽까지 책 정리를 하고... 그러다보니 늘 잠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시간 개념이 없어 밥을 굶는 것도 다반사였습니다.

제 삶은 마치 노예와 같았습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온 몸에 책 먼지가 뽀얗게 묻어 목욕을 하고 싶어도 목욕탕 한번 가지 못했고, 무엇보다 옷 사 입을 돈이 없어 겨울이면 출판사 납품하시는 분들의 점퍼를 얻어 입었습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천원이었는데 돈이 없어 그것을 먹지 못했어요. 오죽했으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죽었으면 좋겠다.’ 싶었겠어요. 정말 천만번은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서점 창고의 공기와 부딪쳐 파장으로 이어졌다.

 

# 사랑하는 그녀와 결혼을 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보처럼 앞만 보고 달렸을까”

“어느 날 우리 가게에 정말 마음에 드는 그녀가 들어왔습니다. 첫눈에 반해버렸어요. 안보는 척하면서 그녀를 훔쳐보곤 했습니다. 때로는 책값을 깎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무료로 선물이라며 쑥 내밀기도 했습니다. 그녀도 절 싫어하진 않았나봐요. 주면 주는 대로 다 받았으니까요. 어쨌거나 우리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의 집은 부석 강수리. 하지만 직장이 인천에 있어 우리는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 26살. 동갑인 그녀와 그렇게 결혼을 했습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짐실이 자전거를 타고 점심이면 집으로 달려가 밥을 먹었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보며 너무 행복해서 몇 번이나 볼을 꼬집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부부는 교대로 서점 카운터를 보며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일터에 있었습니다. 퇴근할 때는 “힘드니까 저녁 먹고 가자”는 집사람 말을 귓전으로 넘겨버리며 늦은 시간에도 꼭 집에 가서 늦은 저녁 식사를 먹곤 했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힘든 그녀를 위해 가사도우미를 썼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내가 하면 되지 굳이 사람을 쓸 일이 뭐 있느냐’며 돌려보내곤 했지요. 집안 일은 물론 가게 일도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보처럼 앞만 보고 달렸는지 후회스러울 뿐입니다.”

 

# 벌어야 한다는 집념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참 미안합니다. 사랑하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 둘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장사가 우선이었기에 아이들은 뒷전이었어요. 그래도 건강하게 잘 자라준 우리아이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도 남들처럼 우산한번 제대로 가져다 주질 못했습니다. 어느 날은 아들이 지 엄마에게 텐트를 사달라고 했나봐요. 집사람이 ‘아빠에게 허락 맡아라.’ 결국 아들은 바위에 계란던지기란 생각이 들었는지 포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또 한 번은 아들이 술 취한 사람의 자전거에 부딪혀 크게 다쳤는데 그때도 저는 아들을 병원에 데려다 주고 다시 와서 장사를 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벌어야 된다는 집념하나로 살았나 봐요. 아들 졸업식에도 지 엄마만 갔지 저는가질 못했습니다. 꽃다발 하나 선뜻 안겨주지 못한 바보스런 아빠. 지금 생각하면 참 못났습니다. 후회가 돼요. 나중에는 우리 식구들이 포기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았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그녀 

여전히 우리 아이들과 나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 하대요. “사모님은 만인의 롤모델이셨습니다”라고요. 사실 얼굴이 예쁜 것도 예쁜 것이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정에 너무 잘 했어요. 저는 그런 집사람이 좋아서 손님들이 “사모님이 너무 예쁘세요”라고 해주면 또 그것이 고마워서 ‘좋은 생각’ 책을 선물하기도 했지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수백 권은 나갔을 겁니다. 누구보다 흐트러지지 않고 착했던 우리 집사람. 그런 사람과 밥 한 번 마음대로 먹지 못했고, 부부동반 모임에 선뜻 함께 앉질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미안하고 가슴 아픈 것이 어디 한두 개일까 마는 제일 한스러운 것은 그 사람을 가게에 붙들어 놓은 것이에요. 젊었을 때는 먹고 살기위해서, 나이 들어서는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려 더 그랬습니다.

작년 12월 5일, 집사람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말 한마디, 미소 한 줌 남기지 않은 채 그녀가 가버렸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떠난 것 같지 않고 제 옆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집사람이 옆에 있는 것 같아 문득문득 찾게 되고, 무엇을 사도 두리번거리게 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죄책감과 괴로움에 가슴이 찢어집니다. 지금은 다 누릴 수 있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집사람이 떠나고 난 후 한동안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미치도록 그리워질 때는 훌쩍 그녀가 잠든 인지공원묘지로 찾아갑니다. 가서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고, 앉아서 주절주절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불러보기도 하고.... 그렇게 한 나절을 함께 있다 돌아옵니다.

 

# 나에게 서점은 삶인 동시에 역사!

이제 서점은 문화공간인 동시에 힐링장소입니다. 말하는 자체로 가슴이 아파 말 길을 돌리기로 하겠습니다. 문화서점은 1981년 6월 29일, 처음에는 다섯 평부터 출발했습니다. 책을 드려다 놓을 돈이 없어 우선 잘 팔릴 수 있는 책만 가져왔어요. 그런데 문제는 서가에 꽂아도 공간이 남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책을 좍좍 펼쳐서 세워놨어요. 날마다 도매상에 가서 그날 팔릴 것만큼만 현금 결제하고 다시 그만큼 책을 들여놓고 팔았습니다. 이곳이 바로 그렇게 해서 커 나가게 된 곳입니다. 

물물이 힘들어 그만 두고 싶다가도 손님들이 “우리 아이가 이 서점에서 책 사다 공부를 했는데 드디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라며 떡을 해 올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펄펄 났어요. “여기가 저희 가족 힐링장소예요”라며 온 가족이 손잡고 오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지난번 지갑 잃어버려 차비 빌렸는데 갚으러 왔습니다”라며 감사의 의미로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를 건네줘 봐요. 그럴 때는 ‘아 내가 참 잘하고 있구나!’라고 스스로 뿌듯해집니다. 

이렇듯 터미널 앞 서점은 문화공간인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치는 방앗간이에요. “서울 병원 가는데 짐 좀 맡겨도 되냐?”는 분들이 있어요. 저는 기꺼이 맡아줍니다. 지금처럼 춥거나 올 여름처럼 폭염이 엄습할 때는 “들어와서 쉬어 가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죠. 이처럼 요즘 서점은 책도 읽고 쉬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는 따뜻한 공간이 되었어요. 이런 소소한 것들이 힘든 와중에도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지팡이가 되어 주고요.

살짝 귀띔하자면 흔들릴 때도 있긴 있었어요. 부동산업자들이 자신에게 건물을 넘기면 어떻겠냐는 말을 했거든요. 사실 그 돈이면 먹고 사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어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하면 저는 어떤 소명의식 같은 것이 있나 봐요. 이 서점은 우리 부부가 피땀 흘려 이룬 터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의 삶이고 저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바로 우리 서산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장소기 때문에 제 맘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 슬프지만 나의 책읽기는 목적 있는 독서

책 읽기 문화가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래도 서점을 운영하면 우리보다는 많은 책을 읽겠지요?”라고 묻습니다. 그러고 보면 많이 읽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 업종에 근무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슬프게도 목적 있는 독서가 많을 겁니다. 달리 말하면 독서는 업무이기도 하다는 거죠(웃음).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공감가는 부분에 눈길이 오래도록 머물다가도 얼른 본업으로 돌변, 재고도 정리하고 파본도 확인하고 반품할 책도 선별하고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런 거 아니겠어요(웃음). 

저희 집안에서는 대소사도 제 일정에 맞추는가 하면 심지어 열외를 시켜주는 일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12년 동안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우습게도 제가 결혼하는 날도 오전 11시까지 문 열어놓고 일하다가 예식장으로 갔다니까요(웃음). 모르는 분들이야 ‘(서점하면)제일 부럽다’고 하지만 막상 해보라고 하면 36계 줄행랑 칠 걸요. 겉보기와는 달리 일이 산더미입니다. 요즘은 옛날에 비해 책이 팔리지 않으니 그나마도 좀 한가해졌습니다만.

지난번에는 어떤 손님이 “서산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한 도시 한 책 읽기’를 하니 매출에 도움이 꽤 되죠?’ 저는 그저 웃었습니다. 솔직히 선정된 책을 서점에서 구입하는 게 아니라 시와 도서관에서 시 재정으로 일괄 구입, 배포하는데 어디 체감이나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책을 가까이하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지요 뭐. 어쨌거나 독서확산은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홍보가 우선시 되어 시민들의 책 읽기문화가 더욱더 활성화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책 두레사업은 아이들에게 기적을 선물하는 일

앞으로도 힘 닿을 때까지 계속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2007년부터 지역 후배들도 독서문화 확산에 조금이나마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책두레사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또 어릴 때 춥고 배고프게 자라서 그 심정 아주 잘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 후배들이 구김살 없이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기도 하구요. 

특히 우리들이 읽는 책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주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것을 쓰는 작가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때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잠을 쫓아가며 글을 쓴다고 하더군요. “한권의 책을 출간하고 나면 치아가 몇 개씩 빠진다.”고 했던 작가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탄생된 책들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밝혀주는 등대역할을 하지요. 저는 등대를 파는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웃음).

 

# 책을 판다는 것은 누군가의 꿈을 대신 이뤄주고 있는 사람

그만둘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볼거리가 없던 옛날에는 책 읽기가 유일한 낙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돈은 없지, 책은 읽고 싶지, 그러다 보니 책을 훔치다 들킨 사람들이 하루에도 숱하게 많았어요(웃음). 지금이야 CCTV가 있어 훔치는 일은 그다지 없습니다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는데 한 친구가 책을 훔쳐 막 달아나는 것을 봤어요. 전 곧 바로 그 사람 뒤를 쫓아갔습니다. 한참을 도망가던 그 친구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우리 집에는 사장님 가게에서 훔친 책이 백 권도 넘게 쌓여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책을 받아가라는 겁니다. 멋모르고 지금의 구법원 뒤 골목으로 그 친구를 뒤따라갔습니다. 그때였어요. 앞장 서 가던 그 친구가 갑자기 돌변하더니 저를 2M도 넘는 하수구 아래로 밀어 넣는 겁니다. 정말 죽을 뻔 했어요. 그 외에도 옥상으로 올라가기에 쫓아 올라가다 포기하고 돌아온 일. 잘못하다간 칼을 빼들거든요. 또 어떤 사람은 뒤쫓아 가는 저에게 들고 있던 가방을 제 얼굴로 던져 상처를 입히는가 하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훔치고 잡고, 잡고 훔치고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그만둘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제가 어디 가서 “서점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들 하더라고요. “제 젊었을 때 꿈이 서점하는 거였어요. 정말 부럽습니다”라고 하는데 감히 어떻게 제가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달리 생각하면 저는 누군가의 꿈을 대신 꿔 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 거죠. 안 그렇습니까?(웃음). 

 

# 도서정가제 취지에 맞게 공정하고 투명한 입찰문화 이뤄져야

입찰시 매장의 간판과 내부사진 찍어서 함께 올리는 것이 옳아요. 그런데 이제는 그때의 전성기가 과연 있었을까 할 정도로 암흑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인터넷 발달과 출산율 저하, 자율학기제로 인한 시험폐지, 크고 작은 도서관이 생기면서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서점들이 적자운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38년을 운영했지만 요즘처럼 이렇게 힘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아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해요. 

이를 만회하고자 타 도시에는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도서정가제 시행이 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서점의 문화적 기능 복원을 위해 시립도서관, 공·사립작은도서관, 평생학습센터 등으로 납품하는 책을 지역 서점에서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자체와 서점 간 상생협력 뿐만 아니라 책 읽는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위해 도서관・서점・시민이 함께하는 독서문화운동으로 정착 시키는 계기가 된 셈이죠.

서산시는 안타깝게도 시립도서관 외에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지역에는 서점이 네 곳 있어요. 시립도서관만이 입찰시 매장이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투명성을 위해 간판과 내부사진을 찍어서 함께 올립니다. 그러다보니 정부 취지와도 일맥상통하게 잘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일선 학교나 서부평생학습관과 같은 곳들입니다. 이곳에는 이런 첨부 서류들이 전혀 필요 없어요. 그러다보니 미장원, 옷가게, 선생님, 등등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입찰을 다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 바로 신고제가 아니고 허가제기 때문이죠. 미장원 하는 사람이 본인의 업종에 서점을 추가하면 바로 입찰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천안에 우리 동기간이 있다 칩시다. 그럼 전화하는 거죠. “옷가게 업종에 서점 하나 추가해서 너도 입찰에 들어가라”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서점은 네 군데인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쟁률이 무지막지합니다. 우리 기자님도 입찰할 수 있어요.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유령회사들이 너무 많아요. 지난번 입찰에는 어이없게도 미용실, 카센터, 종합상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공정성에서 배제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끝으로 서산시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정론직필의 선두적인 언론사이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공정하지 못하고, 투명하지 못한 부분은 반드시 지적해 주십시오. 또한 유령회사들의 난립과 수의계약으로 온당치 못한 일에는 큰소리 내어 주시기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서산시대 독자여러분, 날이 상당히 춥습니다. 늘 건강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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