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가 잡초와의 싸움이라면 사람은 잡마음과의 싸움

▲ 시내의 모 카페에서 다소 이른 아침 조규선 전 서산시장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농사가 잡초와의 싸움이라면 사람은 잡마음과의 싸움

시장직은 시민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때 존재 가치가 주어지는 것!

 

<인터뷰에 들어가며>

 

조규선(69) 전 서산시장. 다소 이른 아침 인터뷰 약속을 한 시내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주차 할 곳이 있었던 가 봅니다?” 그분의 말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얼른 잔을 내려 놓으며 “마침 커피숍 바로 옆 흙으로 다져진 안전한 곳이 있어 세웠습니다. 도시 속에 흙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네요”라고 말하며 혼잣말로 ‘시멘트가 모자라서 안했나?’라고 중얼거렸다. 쌩쌩 달리는 도로 위에는 이른 아침부터 아지랑이가 열기를 푹푹 뿜어내고 있었다.

“흙이 얼마나 신기하고 지혜로운지 몰라요.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기능도 있구요. 생명을 잉태하는 경이로움까지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흙에는 철학이 있다는 것이거든요. 저는 이런 흙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그는 인터뷰 서두에 ‘흙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흙이 좋으세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농사를 지으셨어요?” 기자의 말에 아버지를 보며 자연스레 농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당시 충남도립 서산병원장(직무대리)으로 계시던 아버지께서 주말을 이용하여 야산 개간과 신농법으로 농사를 지으시는 것을 보고 농사일에 뛰어 들었다고 했다.

“저는 아버지를 참 좋아했어요. 아버지는 출장을 갔다 오실 때면 꼭 식구들에게 선물을 챙겨 오셨죠. 무엇보다 자식들 일이라면 맨발 벗고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총학생회장에 당선 되었을 때, 학급별 대의원 모두를 중국집에 불러 당선 축하연을 마련해 주실 정도로 저를 참 자랑스러워했죠. ‘위대한 일을 하도록 기대 받을 때 위대함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란 걸 저는 우리 아버지를 보며 터득했습니다.”(웃음)

기자가 말했다. 아버지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고. 48세 피 끓는 청춘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듯한 그분에게 갑자기 진한 슬픔이 묻어나와 스스로 당황스러웠다.

기자랑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은 듯 웃곤 엉뚱한 말을 했다. “오늘처럼 푹푹 찌는 폭염 속에도 가을은 저만치 오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기자는 “네 그렇겠지요”라며 창밖 아주 먼 곳으로 하늘빛을 보기위해 눈길을 돌려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췄다. 다음은 일문 일답이다.

 

▲ 서산청년회의소 주최 이충무공 탄신 기념 초중사생 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 조 전시장은 서산청년회의소 10대회장(1979년)을 역임했다.

 

Q. ‘전진하는 사회의 지혜로운 안내자’란 표어로 당시 한국일보에 촉망받는 기자로 남을 수도 있었다. 왜 포기하고 다시 농사를 지었나?

(조)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죠. 제 나이 열 아홉살, 막 농고를 졸업하고 부석에서 열심히 농사꾼의 삶을 살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잡초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어요. 그런데 서산 읍내에서 한의원을 하시던 큰형님이 자전거를 타고 부석까지 온 겁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이지요. 대뜸 형님은 자전거 다리를 채 세우지도 못하시며 한국일보에서 연락이 왔는데 표어 응모전에서 1등을 했다는 거예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삽도 내팽겨 치고 어머니와 형님 그리고 저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우리 집에 상금 3만 원이 웬말입니까. 당시 한 달 월급이 6천원 정도였으니 어마어마한 돈 아니겠습니까. <전진하는 사회의 지혜로운 안내자> 이것이 제가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신문주관 기념 표어 모집에 썼던 글귀입니다. 형님이 읍내로 돌아가시고 난 후, 저는 엎드려 한국일보 회장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농고를 나와서 농사를 짓고 있다. 나를 한국일보에 취직 시켜 달라’ 참 당돌한 청년이었지요.(웃음) 그런데 저의 편지를 읽고 신문사에서 답장이 왔습니다. ‘부모님과 협의해서 와라. 초봉은 6천 원이며......’ 한마디로 저의 인생이 새롭게 변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형님과 어머니께 상의를 했더니 물어볼 것도 없이 당장 올라가라고 하더군요.

상금 받으면 주겠다고 하고 외상으로 양복 한 벌을 해 입었어요. 새벽6시 출발, 홍성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물어물어 한국일보 신축사옥에 도착하니 이미 점심시간이 임박해 있더군요. 그 순간 저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서 버렸습니다. 한국일보 14층 사옥 함석판 위 벽에 아주 큰 글자로 <전진하는 사회의 지혜로운 안내자>라는 저의 표어가 붙어 있더군요.

비서실장을 만나니 회장님이 ‘장래가 촉망되니 불러서 채용하면 어떤가’라고 이미 사인을 해놨다고 하더군요. 그때 비서실장이 말합디다. ‘조군, 시기를 놓치면 안되니 일단 대학을 졸업하고 오는 것이 어떻겠냐. 그때 책임지고 채용하겠다. 대학에 다녀라.’ 가정 형편은 생각지도 않고 ‘알았다’고 답하고, 집에 내려와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형님이랑 어머니가 난리가 났어요. ‘지금 대학가기는 어디 대학을 가느냐고, 빨리 들어가는 게(한국일보 취직) 낫지. 돈도 없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7남매에 넷째가 바로 저였거든요.

당장 서울로 다시 올라가라는 성화에 그날 밤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신문사에 취직하면 어떤 쪽이 가장 좋으냐고 말이죠. 친구는 무조건 사장 비서실이 좋으니 그쪽으로 들어가라는 거예요. 알았다고 하고 이튿날 다시 새벽 6시 기차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비서실장을 찾아 가서 ‘형님이 무조건 취직하라고 한다. 그러니 나를 채용해다오.’ 그때 형님 얘기를 해서 그런지 갑자기 ‘그럼 그렇지, 조군이 쓴 것이 아니군’이라는 겁니다. 아니라고, 무슨 소리냐고 제가 썼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뜸 ‘그럼 안내자의 뜻이 뭐지?’라고 묻기에 종이를 달라고 해서 3열 종대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했죠. ‘안내자는 지도자와는 틀립니다. 앞에서 끄는 것도 아니고 뒤에서 미는 것도 아닙니다. 옆에서 구성원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방향을 제시해주고 조력해 주는 것’이라고요.

그때서야 무릎을 팍 치며 맞다고 하더니 갑자기 대우가 틀려지더군요. 편집국 수습기자로 당장 근무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앞뒤 재지도 않고 ’무조건 비서실로 들어가야겠다’고 했습니다. 안된다고 하더군요. 실랑이를 하다 보니 마지막 기차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한국일보에서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제 복을 찬 놈이라고 눈총 꽤나 받았습니다.

농사가 좋으냐는 기자의 말에 “저는 농사가 좀 좋대요.(웃음)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 즉 잡마음과의 싸움이라면 농사는 잡초와의 싸움이지요.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거지요. 그날부터 저는 또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삽으로 매일 구덩이를 파고 과수나무를 심었습니다.”

 

Q, 5대 서산시장에 당선, 그 후 선거법 위반으로 하차했다. 당시 배경과 심경은?

(조) “공무원이 선거를 앞두고 친목회에 가서 당원을 모집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선거를 위한 사조직으로 본거죠. 1심에서 선거법 위반은 무죄로 판명이 났어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저는 떳떳했으니까요. 그래서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느꼈고요. 그런데 2심에서 선거법 200만 원으로 판결이 나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장직에서 물러나야 하지요. 그때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제가 미숙한 대처를 했다는 걸 알았거든요. 부랴부랴 상고를 했지요. 알고 봤더니 통상 1심이 무죄라도 항소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란 걸 늦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상고심에서 기각되었어요. 당시 판결은 ‘선거에 뜻을 가지고 참석했을 것이다’라는, 즉 추론에 의한 판결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간접적인 증거에 의해서 ‘선거를 앞두고 참석한 것은 어쩌면 선거를 위한 사조직일 수 있다. 선거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는 것이었죠. 결국 저는 선거법 위반으로 7개월 만에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속도 많이 상했어요. 그때 대산 ‘망일사’ 스님의 말씀이 저를 많이 다독여 주었습니다. 스님은 제게 ‘화=바보’ 즉 화내는 것은 바보다.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였지요. 그렇게 비우고 나니 좀 평안해 졌습니다.

그 일로 많은 걸 깨달았죠. 억울한 일 앞에서는 투쟁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투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 새마을의 날 기념식에서 감사패를 받는 조 전시장. 조 전 시장은 서산시새마을회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새마을 초창기 정부로 부터 새마을 유공으로 새마을 포장을 받았다.

 

Q. 서산시장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조) “‘에스오일’에서 대산 쪽에 제2공장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민들이 환경문제로 심하게 반대를 했죠. 주민들이 반대하면 시장은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청와대, 산자부, 석유협회 회장, 당시 도지사 등 여기저기서 막 압력이 들어오는 겁니다. 꿈쩍도 안했어요. 그러자 ‘에스오일’ 당시 왕족 출신의 회장이 저를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제가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은 그 전에 이 사람들이 언론 쪽으로 이미 ‘서산시에서 협조해주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긴다’라는 보도자료를 유출한 겁니다. 한마디로 언론을 빌어 압력을 가한 거죠.

회장이 통역 및 보좌진 그리고 임원진들을 대동하고 서산시를 방문했습니다. 시가 협조를 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죠. ‘돌아가라. 그렇지만 당신은 순순히 포기하고 갈 사람이 못 될 것이다. 왜?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니까. 당신들은 이 자리가 좋으니까 오려고 하지 않겠느냐. 내가 알기로는 당신은 왕족이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주민들에 의해서 시장이 되었다. 당신보다 못 배웠지만 적어도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협조하지 않으면 옮긴다는 말로 우리 시를 협박했다. 솔직히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하더라. 그런데 당신이 했던 행동들, 당신의 사고방식은 이미 상식을 벗어났다. 행정은 어디까지나 가치를 추구한다. 그 어떤 것일지라도 주민이 반대하면 우리는 할 수가 없다. 특히 우리 주민들이 환경공해 때문에 싫다고 한다. 이것은 주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저의 말을 다 듣고 난 왕족은 대단히 실례를 저질렀다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시장이라는 자리는 시민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때만이 가장 존재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 서산시장 재임시절 천수만 세계철새기행전을 열며

 

Q. 천수만에 찾아오는 철새는 주민들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철새기행전’을 개최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는데 당시 얘기를 해줄 수 있나?

(조) “AB지구 착공 때부터 제가 시장으로 취임시까지도 여전히 어업피해보상과 농지분양 민원이 제자리걸음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저를 찾아 온 현대건설 임원에게 ‘토지의 가치를 높여주겠다’고 작성된 것이 ‘서산 웰빙레져특구사업 추진 합의서’였습니다. 그 전에 장기 집단 민원이었던 약 5천평 가량의 피해 농어민 농지매입 계약은 현대건설과 계약하기 전에 이미 완료된 상태였구요.

그런데 하나 해결했다고 돌아서니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민들이 천수만에 찾아오는 철새로 골머리를 앓는 거예요. 새를 쫓는다는 이유로 갈대에 불을 놓기도 하고 말이죠. 자연과 인간은 공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새와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이었어요. 처음 주민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사람도 먹을 것이 없는데 새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반대가 심했습니다. 저는 주민들을 설득하여 결국 취임 첫 해 천수만에 철새기행전을 가졌습니다. 대성공이였어요. 나아가 그곳 간척지에서 나오는 ‘기러기 오는 쌀’은 없어서 못 팔정도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연간 20여만 명의 관광객들이 서산을 찾아왔지요. 지역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새와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해 우리 서산시는 정부가 주최한 제17회 지방자치단체 경영 행정 혁신 발표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하여 노무현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아마 우리 지역 주민이라면 다들 ‘철새기행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뛰는 일이지요. 다시 한 번 그날의 영광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 조규선 전 서산시장 가족들. 조 전 시장은 자식들에게 ‘너희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비난의 길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응원한다’고 가르친다.

 

Q. 자녀들이 사회의 일꾼으로 잘 성장해 준 것으로 안다.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전해 줄 교육적인 면은 어떤 것들이 있나?

(조) “1남1녀를 두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잘 신경을 쓰지 못했죠. 우리 안식구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저와 제 안식구는 자식들에게 ‘너희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비난의 길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응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더군요. 그것도 무소의 뿔처럼 우직하게 말이지요.(웃음)

큰 딸은 국회에서 근무를 하다 제 곁으로 내려와 영어교육원을 운영하면서, 한서대학교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결혼해 외손자를 두었습니다. 아들은 대전에 있는 로펌에서 근무를 하다 당진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외손자를 보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생각합니다. 조건 없이 주고 싶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혹시 자녀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라도 더 주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 때문에 혹시 아이들이 아파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더 많이 주고 싶다면 이제는 세 가지를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첫째, 엄마의 무릎을 내어 주십시오. 엄마의 무릎은 나아가 인간성과 겸손함을 주는 인성의 자리입니다. 저는 이 나이에도 어렸을 적 어머니 무릎에서 듣던 옛날이야기가 새록새록 되살아나 행복해지곤 합니다. 어머니의 음성에는 언제나 당신 아들에게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착하고 정의로우며 용감한 정신을 지녀야 한단다’라고 말씀하시는 듯 했습니다.

둘째, 포근한 감성을 주십시오. 요즘 젊은이들은 감동할 줄을 모른다고 우려들을 하십니다. 감격도 잘 안해요. 아름다움을 보고도 아름다움을 모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눈물을 흘려야 할 때 눈물이 없는 것도 정말 우려될 일이구요. 인정이 메마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게 됩니다. 사랑과 정이 가득 차 있어야 할 가슴은 텅텅 비어있고. 아는 것은 많으나 삭막한 사람, 속은 꽉 차 있으나 심장이 차가운 사람.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정신은 자꾸 오염되어 결국 스스로 자멸하고 맙니다.

셋째, 사람을 만들어 주십시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기본 된 교육과목은 바로 ‘사람’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이냐 하는 것을 우선 가르쳐야겠지요. 그것은 바로 부모가 먼저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사셔야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며 일상을 보내나?

(조) “이런 폭염의 날씨에도 저는 가끔 산을 가곤 합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예요. 공자님 말씀을 빌리자면 어진 자가 산을 즐긴다? 뭐 그런 거창한 말은 더구나 제겐 어울리지도 않구요.(웃음) 제가 산을 오르는 것은 어느 날 문득 저를 감동시킨 한 잔의 따뜻한 커피 때문입니다.

선거법 위반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속상함 내지는 상실감을 떨쳐 버리려고 아침 일찍 종종 가까운 부춘산을 훌쩍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빈 주머니에 빵과 우유를 넣고 추적추적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혼자 먼 곳을 바라보며 먹는데 울컥울컥 뭔가 목젖을 타고 올라오려 해요. 꾸역꾸역 먹었는데 그것이 체했나 봅니다. 내려오는데 으실으실 추워지면서 한기가 막 올라오는 겁니다. 마침 여성 두 분이 ‘따뜻한 커피 있는데 한 잔 드시겠어요?’ 평소 즐겨먹는 커피가 아닌데도 그날따라 손에 쥐어주신 커피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맛이었습니다. 때론 이웃에 대한 따뜻한 인정 내지는 훈훈한 사람의 맛. 아무리 세상이 메마르다고 하지만 우리 곁에는 이미 서로를 감싸주는 사랑의 감정이 도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저는 한가한 날이면 한 번씩 산을 찾는 습관이 있습니다. 때론 산에서 해돋이를 맞으면 동시에 새로운 다짐과 함께 꿈을 견고히 하게 되더라고요.”

 

Q. 새로운 시장, 맹정호 시장이 취임했습니다.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조) “이제 민선 7기 출범 두 달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의 기대가 큽니다. 제가 아는 맹정호 시장은 꿈과 감성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요. 지난 날 오랜 동지로서 활동할 때 행동과 생각이 시대를 앞서가고 있는 청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민에게는 성숙된 민주주의가 있지요. 우리 서산이 가지고 있는 자연자원, 문화유산 등 무한한 잠재력에 시장의 리더십과 시민의 창의적인 에너지가 하나로 모아진다면 우리 지역은 크게 발전 할 것이라고 봅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조)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하셨습니까? 그저 삶의 근간인 농촌이 좀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민의 질적 삶을 위해서라도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옆에서 물심양면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전문가들을 만나서 많은 얘기를 할 것이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또 연결시켜주고 말이지요.

우리 서산은 해풍과 일조량, 일교차 등 농사짓기에 참 좋은 기후를 가졌습니다. 예전 금산인삼축제에 갔더니 그곳에 나와 있던 인삼의 샘플들이 서산인삼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이처럼 다른 지역에 비해 자연적 기후는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 농업이 살 길인 기본적 바탕은 이미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저는 꾸준히 4차 산업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것을 지키는 농촌 분들에게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것이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