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숙/수필가

마라토너 선수처럼 앞만 보고 가을을 향해 쉬지도 않고 달려온 농부는 농산물을 다 거둬들이고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거짓말을 한다. “이제는 농사를 그만 짓겠다”고 한다. 사람이 죽어도 씨앗은 남기고 죽으랬다고 농사일에 녹초가 되었어도 씨앗을 남기는 촌로는 봄에 다시 만나자고 무언의 약속도 한다.

봄이 되면 마음은 싱숭생숭 농사일이 걱정되어 몸은 자꾸 밖으로 나간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빈 밭에도 가서 둘러보고 무엇을 심을 것인가 구상도 해본다.

나도 한 때는 농사일이 버거워 몇 년간 직장생활로 잠수를 탔었다. 밭에는 잡곡 잡초들, 논에서 나오는 벼, 애물단지가 나를 돌아오게 한 것이다. “그려, 다시 돌아가자. 땅은 나를 버리지 않는데 내가 뭐 잘 났다고 땅을 버려. 원래 하던 방식대로 땅과 살아보자.”

비료 값, 인건비 농기계 값 등은 천정부지로 올라가는데 벼 매상 값이나 농산물 값은 하락하여 빚지고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딱 좋은 것이다.

이젠 나이를 먹었으니 신기술 농법은 물 건너가고…….

논 몇 마지기 짓는 사람들은 아예 도지를 주는 실정이다. 농사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것들 관절과 아픈 허리는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다. 매일 되풀이되는 풀과의 전쟁도 그렇다.

가물었던 땅에 비가 오면 불그스름한 황토흙은 만지기에 보드라워 잡곡 씨앗을 호미로 살살 묻고 나면 며칠 만에 떡잎이 나와 귀요미를 자처한다. 잡곡이 잡것 되더라도 밭에 호랑이 새끼 낳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심어야 한다.

밭에 곡식도 번갈아 가면서 심어야 병이 덜 간다. 지난 해 들깨를 심었던 자리에 참깨로 바꾸어 심어보려고 구상을 해 놓았다. 참깨는 들깨보다 물기가 많으면 시들어서 죽는 것이 다반사다. 참깨를 심으려면 비닐을 덮어야 하는데 남편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언제 짬이 나려나. 마누라보다 아끼는 애첩인 트랙터만 데리고 날마다 논과 밭으로 가니까 손 빌리기가 어렵다.

“들깨와 참깨 심을 곳을 일 년만 토지를 바꿔 봐유. 게서 게인걸 알지만 워떻헌대유~. 그나저나 원제 짬이 나능거유. 비닐을 덮어야 허는디.”

대답이 읎다

“・・・・・・.”

“언제 비닐을 덮을 것이냐구유?” 내 말이 곱지가 않다. 원래 말수가 적은 줄 알면서도 재차 말을 건네 본다. 결혼 삼년 차 깨소금 냄새만 나는 막내딸이 일을 거들어 주면서 한 마디 한다.

“엄마 아빠는 환장 커플이고요~우리 둘은 환상 커플이예요”라고 한다. 얼마나 우습던지 나는 소리 내어 웃고 남편은 빙그레 웃는다. 웃음조차 아끼는 남편이다.

“그려, 맞다 맞아.”

“엄마 아빠는 ‘환상 커플’ 되기는 물 건너갔으니 깨, 너희들은 ‘환장 커플’ 되지 않게 지금처럼 잘 살아봐.”

일에 지치면 말도 안 나오고 허리는 자꾸 꼬부라지면서 마음만 바쁘지. 빨리 걸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외모로 봐도 환장 커플일 수밖에 없다.

대답도 없이 나오는 남편은 창고에 가서 비닐을 어깨에 메고 밭으로 향한다. 나도 잽싸게 삽 한 자루 어께에 메고 쫒아간다. 말은 안 해도 눈치로도 잘 통하는 엇박자 부부다. 비닐에 바람이 들지 않도록 둘이가 맞잡고 살살 끌고 가는데 마침 전화가 온다. 전화 받을 입장이 아니다. 전화를 받으니까 동네 아우인데 전화 내용이 길 것 같아서 “지금 신랑하고 나하고 중요한 일을 허니 깨 얼능 끊어”하고 일방적으로 끊는데 전화 속에서 흐릿하게 들리는 소리가 “엉아, 지금 중요한 것이 뭔데” 하는 것이다.

일 할 적에는 상황 판단을 해서 웃기는 얘기도 해야 약이 된다. 골이 잔뜩 난 것처럼 입 다물고 해야 일에 능률이 난다고 하지만 더러는 웃기는 얘기도 해야 허리도 펴 본다. 부녀회의 날, 뜬금없이 내가 한 말을 아우가 꺼낸다. “엉아 신랑하고 중요한 일이 뭐였어?”하고 물어본다.

“무슨 얘기를 지금 허는 것이여. 나는 까마득허게 잊어 버렸는디.” 아우는 하도 우스워서 안 잊었단다.

“둘이서 비닐을 맞잡구 가니깨~ 즌화를 받을 수가 읎었지.”

“그래서 해본 소리여.”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부녀회는 오십대 부터 팔십 대까지 회원이 다양하지만 사십대 아래는 농사꾼이 한 명도 읎다. 일을 하다 쉬어보는 부녀회 날은 숨통 트이는 날이다.

잡곡을 심는 것은 가족들과 먹으려고 심기도 하지만 특수작물이 아니고는 심을 것이 마땅치가 안해서다. 지난여름 가뭄과 씨름 하면서 농사지은 것은 팥, 녹두, 수수, 콩, 메주콩, 서리태 등 등 가짓수가 많다. 팔려고 하니까 여름에 뙤약볕에서 일한 것에 비하면 품값도 안 나온다. 메주콩은 메주를 쑤어서 돌려 막기라도 하지만, 팥값도 별루였다. 동지가 애동지여서 회관이나 집에서도 팥죽을 쑤어 먹질 안했으니까 팥 소비를 못했던 것 같다.

해마다 오르지 않는 잡곡은 결국 잡것이 되었지만 토지를 바꾸어 참깨를 심은 것은 다행이었다. 가뭄 덕에 참깨도 잘 되고 값도 괜찮았다.

어느 분이 나보고 그랬다. “어째서 잡것만 심느냐”고 했다. 나도 돈 안 되는 잡것은 심고 싶은 맘이 없지만 사람도 토종이요, 옛날식대로 토종 농사 벱인걸 어쩌랴···.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