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숙 수필가/수석동

요즘 날씨가 사나워 톡톡 쏘는 고추만큼이나 아리고 얼얼하다. 동파 사건은 예서제서 들리고 바깥에 나가는 것도 겁이 난다. 누구네집 토끼인줄은 몰라도 며칠 전 부터 토끼 한 쌍이 돌아다니며 내가 제일 아끼는 보리를 뜯어 먹는다. 소복이 쌓인 눈은 빈틈도 없이 골고루 분포되어 보리밭을 덮어 놓았다.

닭장 가는 숫눈 길 위에 토끼 발자국이 있는걸 보니 먹이를 찾아다닌 모양이다. 요놈의 토끼들 얼마나 사이가 좋으면 둘이 나란히 갔을까. 우리 부부는 평생 살아도 숫눈길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데, 토끼 발자국이 찍어낸 무늬에 시샘을 하며 백설의 아름다움을 싹싹 쓸어내어 길을 터놓고 새벽이면 힘차게 울어대는 닭에게 모이를 준다. 울안에만 갇혀있던 닭들이라 어쩌다 나오면 밖에서 맴맴 돌기만 하고 들어갈 줄은 모른다.

“야!”

“닭대가리들아 들어갈 줄을 모르면 나오지나 말란 말이야.”

“알도 안 낳는 것들이 속을 썩여.”

날마다 계란을 낳아주더니 춥고 눈이 오자 계란 낳는 일이 뚝 끊어졌다. 그 뿐인가 눈이 좀 많이 왔다 싶으면 버스도 안다니는 영락없는 오지마을이 된다. 어디 돌아다니다 미끄러지기라도 할 까봐 집에만 있는데 동네 멤버한테 전화가 왔다.

“우리들 집에 있기가 지루 하니까 담장 밖을 넘어 어디론가 떠나요”하는 것이다.

농한기라고 해도 제대로 놀아본 것 같지도 않은데 입춘도 지난 지 며칠 되었다. 봄이 시작되면 슬슬 농사 준비를 해야 되니까 맘 놓고 무박으로 놀다 오자는 것이었다.

“아∼∼ 세월은 흘러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이구나, 그러면 또 한 살 먹고.”

“끝자락이 좋은 건가 한 살 더 먹는 것이 좋은가 둘 다 노, 다.”

“그려, 장소는 어디야.”

“청량리역에 가서 밤기차를 타고 강원도 태백 눈꽃 축제에 가요.”

“안 그래도 심심 한데 잘 되었네.”

텔레비전에서 겨울만 되면 홍보하는 뉴스를 보고도 엄두도 못 냈던 것이다. 멤버 한 명이 한 번 갔다 온 경험으로 모든 것을 맡아서 여행사에 예약을 해 놨다. 우리들은 그저 잘 따라만 다니면 도와주는 것이다. 처음으로 길 찾아 떠나는 여행이 설레기만 한다. 여덟 명이 가는데 마음도 복장도 완전 무장을 하고 떠났는데 거기까지는 좋았다.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내려 지하철 표를 사려고 가는데 마침 퇴근시간이라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두툼하게 입은 몸에서는 땀이 흐른다.

길을 아는 아우가 앞에 선발대로 가면 우리 일행 일 곱 명은 마음에 줄을 만들어서 일렬로 따라서 가는 모습이 마치 군인 교육 받는 것처럼 엄하다. 한 명 이라도 뒤처지면 안 되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가야 한다. 지하철 표를 끊어야 하는데 이것이 문제다. 우대증으로 끊으려면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한단다. 주민등록증 가지고 간 사람과 안가지고 간 사람 희비가 엇갈린다. 여러 가지로 대장을 힘들게 한다. 내 나이 우대증을 사용할 나이가 훨씬 넘었건만 복잡하다는 관계로 사용을 안 해서 서툴기만 하다.

농촌에서 살면서 서울을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담장 밖을 나온 멤버들도 서툴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닭장 안에 있는 우리 닭과 똑 같다. 길 한번 제대로 못 찾는다. 하루 멋지게 힐링을 하여 새로운 봄, 새로운 기분으로 농사일을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겨울의 끝자락에 무게를 두고 농사짓는 멤버만 모여서 갔다. 배낭에는 각자가 농시지은 음식 한 가지씩 담겨있다. 돌아다니다 입이 심심 하면 수시로 먹자는 것이다. 지하철 표 사느라고 시간 뺏기고 갈아타느라고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또 다시 오던 길 가고 번갯불처럼 돌아가는 세상, 육칠십 대가 실행하기엔 버거운 나이여서 오늘에 실수도 세월 가면 추억이 된단다.

땅속 길 전철은 난 숨이 막히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남들 하는 대로 줄을 서서 주민등록증을 네모진 칸에 놓고 다음엔 오백 원을 옆구리에 세워서 밀어 넣으니까 땡그랑 하고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란 표가 나온다.

마지막 내려서 주민등록증을 어느 기계에 갖다 놓으니까 옆구리로 들어간 동전이 요란하게 떼구루루 굴러 나온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동전 오백 원의 심술에, 처음으로 허가받은 공짜를 경험 하니 마음이 묘해진다.

청량리역에서 열한시 기차를 기다리는데 사연과 보따리를 짊어진 남·여 노숙인 들이 속속 들어와 의자에 앉는다. 일반인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노숙인 들은 모자를 눌러 쓰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어느 노숙인은 쉼터에서 잠간 쉬러 왔는지 담당자들이 가자고 졸라서 데리고 간다. 노숙인 들도 가족이 있고 부모도 있을 터, 이 추위에 저리 떨고 있을까 괜스레 노숙인들 한테 맘이 쏠린다.

밤새워 기차를 타고 새벽 다섯 시에 내려서 찬바람과 파도치는 그 유명한 정동진에서 먹구름이 낀 해맞이도 했다.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강원도의 별미 빙어튀김, 오징어순대, 메밀전병 등 골고루 맛을 보고 태백 눈꽃 축제장에서 얼음 조각상도 감상하고 연탄 체험 갱에도 들어가 광부들의 옛날 모습은 물론 모든 것을 전시해 놓은 육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귀한 광석도 보았다. 즐거운 맘으로 집에 도착하니까 시계는 밤 열두시 반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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