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윤 백지화연대 집행위원장

작년 8월, 인근 주민들과 시민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산 오토밸리 산업폐기물매립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주민, 교사, 학생, 목사, 스님, 신부, 아이들의 엄마, 아빠, 변호사,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기업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산 시민들이 공사 중단과 대화를 통한 합리적 해결을 염원하고 갈수록 악화되는 서산의 환경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지면에 담았다. 여전히 공사는 진행 중이고 포크레인의 굉음과 발파공사의 울림만이 시민들의 목소리에 답하고 있다. 서산시, 충남도, 환경부 등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은 아직도 서로에게 책임 떠넘기기, 발뺌하기에 급급하고, 주민과 시민을 사실상 배제한 체 진행된 행정절차에 제동장치는 없었다.

희망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그러했다. 진실과 정의가 항상 승리할 수는 없다며 그게 이치라며 이 세상이 씁쓸하게 충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산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민들에게 이 문제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계산기를 두드려서 유불리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눈비를 맞으며 피켓을 들었고, 산폐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고, 거리를 걸었다. 매주 모여서 상의했고 토론했다. 천막을 치고 한뎃잠을 잤고 목숨을 걸고 단식을 했다. 불리하다, 불가능하다, 안된다고 전문가와 정치인들이 고개를 가로저을 때, 끝까지 목표를 향해 싸워나가는 어찌 보면 비상식적인 그 열의와 열정이 오히려 비상식적인 현실을 상식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주민 의견수렴 절차는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없었고 시민들의 자기결정권은 무시되는 현실이 드러났다. 시정의 주인인 시민이 행정에서 소외되고 시 정책에 반대하면 불순세력이라 매도당하는 기형적 현실이 폭로되었다. 외지의 유독성 폐기물까지 파묻으려 했던 폐기물 장사꾼의 이윤추구 의도가 드러났고, 이에 부화뇌동하고 최소한의 성의가 있다면 확인할 수 있었던 시행사의 눈속임과 서류조작을 방관했던 관련 기관들의 행태가 밝혀졌다. 이제 산폐장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비상식과 불의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 언젠간 틈이 열리고 가능성이 생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렇게 우리는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산폐장 문제를 해결함과 함께 시민사회 앞에 놓인 과제 또한 산적해 있음을 확인했다. 반대 안할만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주민과 대화했다고 하는 식의 눈 가리기 행정, 공공의 영역을 사기업에게 맡기고 이윤을 보장해줘야 하는 상황, 돈 없고 빽 없으면 어디 내놓고 하소연할 곳도 없는 현실, 지역사회 운영에 대한 시민사회의 성숙한 토론과 합의과정, 지역에 상존하는 화학물질-환경유해시설에 대해 지역민들의 충분한 알권리가 보장되고 감시와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문제...

그리고 ‘개발지상주의’의 폐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과 지역 운영원리의 전환이 필요함도 확인했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칩을 만들던 젊은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백혈병에 걸려 백여 명이 사망했고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충남 아산에 삼성디스플레이 탕정공장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유독성 물질의 온상인 대산 석유화학단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차를 끌고 다닌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는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까? 개발, 생산력 향상,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선택해서 우리의 환경과 우리 중 그 누군가의 희생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바꾸는 것. 산폐장 문제가 지역사회에 던지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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