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숙 수필가/서산시 수석동

어느 가을 날 햇빛이 등짝을 내리꽂는 따사로운 날 나는 마늘을 심고 있었다. 가을 짧은 해를 붙잡고 부지런히 손놀림을 한다. 어쩌다 고개를 잠깐 들고 보니까 깡마르고 구부정한 할머니가 길 건너편에서 걸어오고 있다. 동네사람 구경한지도 오래 되었고 누군가 하고 일손을 놓고 그 사람이 바짝 내 앞으로 오기만을 기다린다. 오래만 에 만나보는 수연이 엄마였다.

“어디 가유?”

“너무 심심해서 운동 댕기는 거여” 근력이 없어 보여서 나는 여쭈어 보았다. “진지는 잘 잡수셔유?”

“밥맛이 읎어 먹기가 싫어서 대충 먹지”

“반찬은 워떻게 잡수슈?” 뭐 드릴 것도 없으면서 밭에서 자꾸 물어본다. 이가 부실해서 음식물을 깨물지도 못하고 내 생각엔 힘겹게 잡수시는 것 같다. 가끔은 흰죽도 쑤어서 잡수신단다. 말씀 몇 마디 나누시고 “어서 마늘 심어” 하시고 자리를 뜨신다. 젊어서는 콤바인도 따라 다니고 죽기 살기로 일을 하시어 자손들 시집 장가보내고 다 잘 살건만 이젠 연세가 있으셔서 근력이 부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어른들 호박죽이라도 쑤어서 더 춥기 전에 오시라고 해서 나누어 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수연이 엄마를 뵈니까 불현듯 난다.

늙음을 막지 못하는 인생 사계절 중에, 나도 인생 초가을로 접어든 것 같다. 생을 마감하느라고 곱던 단풍도 떨어지고 마늘 심는 것도 막바지 겨울 문턱이다. 마늘을 심고 집으로 올 때 단호박을 따서 댓돌위에 놓았다. 별보고 나왔다 별 보고 들어가는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까 호박죽을 쑬 날이 없다. 날마다 기회를 엿보지만 날짜는 보이지 않는다. 요 며칠 전 첫눈이 내렷다.

첫눈이 얼마나 퍼붓는지 앞을 가려서 잘 걷지도 못했다. 호박을 따다 댓돌위에 갖다 놓은 지 이십일도 넘었다 호박 한통이 주방으로 가는 시간은 그렇게도 길었다. 농촌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지만 눈이 온 것이다. 막간을 이용하여 댓돌위에 있던 호박을 삶아놓고 회관에 못가는 분들만 오시라고 했다. 일을 못하는 게 아니다 하우스에 들어가면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곡식들이 즐비하게 줄 서있다. 일 못한다는 것은 일종에 핑계다. 나도 쉬어 보자는 게다.

“오늘, 호박죽을 쑬 것이니까 즈이집으루 잡수시러 오셔유” 전화를 거는 족족 다들 잘도 받는다.

“음, 그려 얼능 갈게” 가을일이 얼추 끝이 나자 회관에서는 어른들을 위한 노래교실, 문해교실, 운동 등 프로그램을 정해 놓았다. 그래서 주로 못 가시는 분들만 불렀다. 제일 먼저 다한이 할머니가 오셨다. “놀러 오라구 해서 서둘러 왔어”하신다. 하도 바빠서 무 여덟 개 동치미를 담았더니 알맞게 익었다. 예약은 안했어도 조촐한 밥상은 아니다. 호박죽, 동치미, 배추 겉절이, 웃음이 한상, 맥주, 소주, 대봉감도 바빠서 갈퀴로 후려쳐서 깨지면서 몇 개 따서 둔 것이다. 술은 우리 집에 원래 있던 것으로 여섯 어르신 중에 다한이 할머니만 잡수시는데 다 내다 놓았다.

먹을 줄 모르는 술잔을 들고 수연이 엄마한테 “우리 건강을 위하여”라고 “한마디만 해 보슈?” 했더니 서슴없이 “야!”하고 잔을 내려놓는다. 한 마디에 방이 떠나가라고 크게 한바탕 웃었다. 호박죽을 놓고 우린 그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하찮으면서도 여러 사람이 먹고 정을 나누는 음식이다. 잡수시고 남은 죽을 “집에 계시는 할아버지들 갖다 드리셔유”하니까

“나도 잘 먹었는디 싫어” 한사코 말리시는 어른들에게 들려 보냈다.

올 봄 모내기를 할 무렵부터 가뭄의 터널은 길고도 길어 심어놓은 곡식들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 애매한 하늘만 원망 했었다. 담 뒷밭에 땅콩을 심어놓고 싹이 나질 안 해서 기다리다가 참깨를 또 심었다. 가뭄이 끝나고 장마가 오자 한 구덩이에서 땅콩과 참깨가 너도 나도 앞 다투어 싹이 나온다.

한 구덩이에서 두 가지가 나오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잡초 뽑기에 여념이 없다. 참깨는 어느새 훌쩍 커버리고 땅콩은 납작하게 누워서 큰다. 가뭄 덕분에 드문드문 났던 참깨가 여름내 동고동락했던 나에게 효자노릇을 할 판이다. 남들은 장마 때문에 참깨를 다 썩혔는데 나는 다행으로 장마가 지나고 초가을 알밤 삼형제가 육지로 갈바람(가을바람) 타고 떨어지던 날부터 참깨를 베기 시작하여 벼와 함께 늦게 베었다. 참깨 알이 굵고 뽀얀 것이 터는 대로 한꺼번에 몇 말씩 떨어진다. 가뭄이 끝이 나고 갈 장마 불청객이 또 말썽이다. 논에 물이 고여 벼 벨 것이 걱정이다. 늦은 장마 덕에 오이와 호박도 밭구텡이에 심었더니 물을 실컷 먹은 이놈의 열매들이 얼마나 열어대는지 주체를 못하겠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따주려니 바쁜데 이 짓도 못하겠다. 늦게 심은 단 호박도 흥부네 아이들만큼 주렁주렁 매달렸지만 익은 것은 몇 개 안된다. 나는 오이나 호박 심을 적에 성질이 급해서 발길로 툭 차서 구덩이를 파서 씨앗을 넣고 대충 덮는다. 그렇게 망나니처럼 심어도 모든 열매는 잘도 매달린다. 서울에 있는 손주 녀석이 할미를 닮았는지 고기는 별루고 호박죽을 잘 먹는다고 아들 녀석도 단호박을 챙긴다. 땅은 참 착하다. 늦게 심거나 무얼 심던지 다 받아준다.

다만 서리가 내리면 곡식은 그만이다. 자급자족은 농부들의 특권으로 값을 치루지 않고 따다 먹는 것이다. 곡식은 주인이 돌봐준 만큼 내 준다. 우리가 지어먹는 논밭도 더러는 투정을 부릴 때가 있다. 농부는 투정을 말없이 받아주어야 한다.

땅심 돋우기를 잘 해주어야 하고 가뭄이 길면 곡식은 물이 필요해 시들어가고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싫어 뿌리가 썩어 농부들의 마음은 흐렸다 개었다 하지만 또 다음 해에 농사가 있기 때문에 논과 밭이 투정을 부려도 이래서 농사를 짓는 것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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