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근 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

서산 부석사금동관음상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

1330년 고려의 국운은 쇠락하고 왕실은 타락을 거듭하여 힘없는 민초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고려의 조그만 마을 서주에는 작은 등불이 켜졌다.

신분을 뛰어 넘은 32명의 민초들은 평등세상 구현을 꿈꾸며 그 간절한 염원을 관세음보살에 담았다. 이 관세음보살이 영원히 부석사에 존재함으로 그들은 내세에서도 의지처가 되리라하는 서원을 굳건히 하였다.

고려의 불사(佛事)들이 대부분 왕실과 귀족, 고승에 의해 발원되고 이뤄진 바와 달리 유일하게 민초들의 염원을 담은 관음상은 영원히 부석사에 있을 것이란 서원과 달리 잦은 왜구들의 침입과 약탈로 인해 머나먼 섬, 대마도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시기 약탈당한 대부분의 불상들이 복장물이 털리고, 손발이 잘려 훼손이 극심하지만 부석사 관음상만은 복장물을 지켰다. 왜구의 수장이 세운 대마도 관음사에 1526년 관음상이 등장한 이후 425년만인 1951년 관음상은 복장물을 드러남으로 대마도와 인근에 있는 수많은 한국 불상 중에 거의 유일하게 출생신고를 하게 되었다.

관음상을 되찾아오고자 하는 노력은 1990년 후반부터 지속되었다. 그러나 귀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귀환 노력을 하던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갑작스런 별세로 노력은 중단되었다. 그런 와중에 2012년 한국인 절도단에 의해 관음상이 한국에 귀환하였다. 더구나 국제세관을 통관한 뜻밖의 귀환이었다.

관음상을 되찾기 위해 부석사와 서산주민들의 노력은 가속되었다. 2013년 2월 대전법원은

“일본 관음사가 정당하게 취득한 것을 입증할 때까지 불상을 일본으로 반환하는 것을 금지”하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가처분 결정이후 일본 측은 취득경위 소명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관음상이 스스로 걸어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황당한 주장을 내놓았다. 일본 정부는 1970년 유네스코협약을 내세워 도난품의 환부를 주장하였다. 국내 일부에서도 윤리적 문제를 내세워 일본으로 반환하자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관음상을 부석사가 돌려달라는 것이 소탐대실이라고도 하였다.

이에 부석사는 2015년 관음상 인도소송을 제기하였다. 재판은 국내외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총 9회에 걸쳐 이뤄졌다. 2017년 1월 26일 재판부는 “부석사 소유임이 넉넉히 인정”된다는 판결과 함께 즉시 부석사로 이운할 것을 결정하였다.

을유년 설날을 앞두고 내려진 판결에 부석사와 서산주민들의 환호하였다. 꿈에 그리던 관세음보살이 700여년 만에 귀환한다니 팍팍한 세상사에도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검찰은 항소와 함께 관음상의 부석사 이운을 반대하였고 또 다른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하나의 법원에서 두 개의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검찰의 항소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관음상의 소유권이 현 부석사에 있는지 부석사보고 증명하라는 것이다. 고려 당시의 부석사가 현 부석사가 아니면 소유권이 없음으로 일본으로 ‘환부’할 명분이 생길 것이다.

둘째는 관음상의 출생신고서인 ‘결연문’이 가짜이므로 이것의 진정성을 부석사가 입증하라는 것이다. 결연문이 가짜이면 부석사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음으로 이 또한 일본에 돌려줄 명분이 된다. 다시 말해 검찰은 1심에서 약탈 문제가 입증되니 새로운 쟁점을 들고 나 온 것이다. 항소 이유에 대해 일본과의 외교문제도 있음을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하였다. 문화주권보다는 외교눈치보기가 중요하는 반증이다.

이에 대해 부석사측은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 문헌자료와 관련 증언, 현장 조사 등 입증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 검찰의 허위 주장과 일본 정부의 요구에 대응하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불법 문화재의 입증책임은 청구자에게 있었다. 현 소장자는 불법임이 입증될 때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주장하였고 선의의 구매자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공소시효 완료로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는 1990년대에 끝났다. 소유권 입증 책임은 피청구자 즉 현소장자에게 있으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소유권을 확립하지 못하면 그 문화재는 소유권 양도를 할 수 없다는 1990년 이후 국제사회의 원칙이 되었다. 결국 일본정부와 국내 일부에서 일본으로 반환을 주장하는 1970년 유네스코 협약 운운은 지나 간 레파토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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