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탐방 : 철의 땅이며 백제의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서산의 역사 추적 서산, 백제부흥군 항쟁의 전장터③

서산 “백제의 멸망을 애닮아 하다”
당군(唐軍), 지곡면 일대 ‘평이현(平夷縣)이라 불러


서산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결사 항쟁의 전장터였다.
당시 서산은 한성백제 이후 웅진백제, 사비백제를 거치면서 중국과의 해양교통에 있어서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와의 해상 군사활동 접경지로 중요한 위치였으므로 백제 지방통치제도의 핵심인 방군성제(方郡城制)의 오방성(五方城) 가운데 서방성(西方城) 치소(治所)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 현재 지곡면 일대는 지육현으로 당시 치소로는 지금의 지곡면 산성리 산 정상부에 조성된 부성산성(富城山城)이 유력하다. 백제 멸망 후 당군이 지육현을 평이현으로 개칭한 것은 서산 지역이 백제 멸망 후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오랑캐를 평정하였다’는 의미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660년 백제는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멸망하였다. 당은 백제 고지(故地)에 대한 지배 야욕을 드러내며 행정 구역을 개편,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를 설치하였으나 지방 각지에서 백제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됨에 따라 실질적으로 당군이 지배한 곳은 웅진·사비 지역 일원에 국한되었다.
이처럼 백제 부흥 운동은 지방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흥기하였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 지역으로부터 서북 방면의 임존성,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는 주류
성(周留城) 등이 중심지였다. 사비기 각 지방의 중심지였던 방성도 부흥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데, 동방의 득안성(得安城)과 중방의 고사비성(古沙比城) 등이 부흥군에 적극 가담하였다는 점은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서방성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산지역 역시 임존성과 더불어 백제 서북 방면의 부흥군의 주요 근거지로 활약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서 거병하였을 때 10일 만에 3만여 명이 운집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서북 방면의 부흥군의 군세가 대단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승려 출신인 도침이 부흥 운동의 지도자였고 서산 지역의 가야산이 백제 불교의 성지였던 점을 고려하면 서산 지역에서도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음을 쉽게 짐작할 수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 지도자 간 내분으로 부흥운동 3년만인 663년 신라·당 연합군은 백강구에서 백제·일본 연합군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켜 사실상 부흥 운동을 진압하였다.
이후 당은 664년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 유민을 위무하는 동시에 1도독부 7주 51현의 웅진도독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중 7주중 하나였던 지심주는 충청남도 예산 대흥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지역은 백제시대 지육현이 평이현으로 명칭만 바뀐 채 지심주에 속하였다.
이후 점령지에 대한 당군의 야욕으로 당군과 신라가 격돌한 신라·당 전쟁이 발발하여 다시 전운에 휩싸였다. 결국 신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667년 웅진도독부는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만주의 건안고성으로 옮겨졌으며, 백제 고지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평이현도 자연스레 옛 지명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웅주 부성군(富城郡)의 속현으로 지육현으로, 고려 시대에는 양광도(楊廣道) 부성군의 영현인 지곡현(地谷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에 속하였으며, 1914년 지곡면으로 개편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제부흥운동 배경에는 백제불교가 있어
서산 백제인들의 애국심과 자주성 발로


백제가 멸망한 후에 활발히 전개된 백제부흥운동이 가야산을 경계로 내륙의 예산과 해안의 서산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가야산 일대에 꽃피웠던 백제불교와의 일정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유추해 보았을 때 서라벌의 왕족중심의 교종(敎宗)에 반하여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는 선종(禪宗)이 유행하면서 충남의 서북부에는 보령의 성주산문(聖住山門)이 크게 세를 떨쳤으며 이때 부성군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崔致遠)이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의 비문을 썼을 정도로 서산과 성주산파가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다.
이처럼 통일신라시기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던 서산은 고려 건국 후에는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으면서 불교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야산록에 자리 잡은 보원사로서 법인국사탑비(法印國師塔碑)에 의하면 승려 탄문(坦文)이 말년에 가야산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탄문국사가 보원사로 들어갈 때 선승(禪僧)과 교승(敎僧) 천여 명이 영접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보원사의 위세가 대단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서산지역의 정치적 성향을 추론해보면 후삼국이 치열한 다툼을 벌일 때 서산은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에 속했고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직후에는 일시적으로 후백제에 귀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의 개국공신들 가운데 복지겸(卜智謙)과 박술희(朴述熙) 등이 운산면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서산이 친고려적인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부흥 운동은 외세의 침입에 맞서 자주성을 되찾기 위한 고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항쟁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 지역의 서북 방면에서 처음으로 백제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최종적으로 나·당 연합군에 항거하다가 부흥 운동이 막을 내린 곳 역시 서북 지역이었다. 이는 서북 지역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서산 지역에 거주한 백제인들의 애국심과 자주성을 잘 보여준다.


서산태안지역 해상세력 새롭게 등장
서산, 대당교통로의 중요성 추정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시기 웅천주 지역에서 나타난 해상세력의 등장을 우리는 주목한다. 이들은 해상을 통한 교역활동을 하는 등 새롭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충청도의 해상세력의 움직임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는 통일신라 하대에 가서야 찾아진다. 당시 충청도의 포구가 차지하였을 위치는 견당사의 왕복 행로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동남해 연안의 항구는 신라 견당성의 입출항지로서 적당치 않고, 서해안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다. 여러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당을 왕래하는 나당인들은 대부분 서해안 항구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하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서해안의 해상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서해 연안의 항구로서 충청도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곳은 당진군의 대진이다. 대진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당시 가장 중요한 출발지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에 있던 당은포였다. 당은포는 유인궤가 이끈 당의 고구려 정벌 수군이 산동반도에서 출항하여 당항진, 즉 당은포에 도착하였다. 진흥왕대 당항성을 신라의 영토로 삼은 이후 나당 교통의 관문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의 대당조공로를 막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에 경주-당은포를 잇는 북쪽 길이 형성되게 된다.
대진은 신라의 혜성군에 속하였는데,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여기에 신라는 수군창과 곡창을 설치하였으며, 당의 사신과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보아 혜성군은 신라시대에 대당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서해안의 충청도 지역에 속하는 대진은 서남해안의 회진까지 이르는 동안 다른 포구와의 연결통로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대진에 인접한 서산과 태안지역 역시 해상의 중심지로 다시 떠올랐다는 사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최치원이 부성군, 즉 서산의 지방관으로 왔다는 사실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당유학생이었던 최치원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는 역시 이 지역이 대당교통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진철대사 이엄의 경우를 통해서 또한 살펴볼 수 있다. 경주 김씨인 이엄의 아버지는 진골귀족으로 경주에서 유락하여 웅천으로, 다시 부성군을 거쳐 소태현, 즉 태안지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소태에서 태어난 것이다. 웅천주를 거쳐서 왔다는 사실은 웅천주 지역이 김헌창 반란의 중심지였다는 점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다. 즉 이와 같이 진골귀족이 서산과, 태안지역으로 옮겨오면서 이 지역 해상세력의 움직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신라 하대에 들어와서 웅천주의 해안지역에는 해상교역을 통해 부를 형성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해상세력이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앙과의 연결을 꾀하였던 이들 세력 역시 신라 말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내륙의 세력들과 함께 후삼국을 여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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