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국 마한에서 성장하다①

3세기 말 고이왕 집권 서산 백제에 속하다

사라진 백제사, 한반도 역사에서 내포 지역은 물水을 통해 선진문물이 가장 먼저 닿고, 그 문물들이 공유되고 다시 재창조되어 다른 나라로 진출하던 공유·연결의 플랫폼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잊힐지언정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본지는 이번 충남도 지원 기획취재를 통해 1500여 년 전 일본의 국보 칠지도를 제작한 철의 땅이며 한 때 백제의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내포지역 서산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 미래비전을 그려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백제국 마한에서 성장하다

- 3세기 말 고이왕 집권 서산 백제에 속하다

②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불’

③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

④ 통일신라시대 대중국 해상 교통의 요충지

⑤ 역사속으로 사라진 해상 실크로드의 꿈

⑥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부활

부장리 금관모의 주인은?

마한의 후예로 서산지역 토착세력 수장

지난 2005년 서산 음암면 부장리에서 금동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600년이 지난 오늘 날 금동관이 전하고 싶은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역사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백제사, 더군다나 남은 유물조차 거의 없는 현실에서 금동관은 역사의 진실을 풀 블랙박스다. 이를 추적해 본다.

백제 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금동관은 고흥 길두리를 비롯하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공주 수촌리(2점), 서산 부장리, 천안 용원리에서 발견된 7종이다. 이들 백제 금동관을 살펴보면 고도의 제작 기술뿐만 아니라 제작에 필요한 금이나 수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 수종인 백화수피까지 쓰였다.

무덤양식도 의미심장하다. 서산 부장리 고분과 같은 시기였던 공주 수촌리 고분의 경우, 가족묘로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1~2호는 서산 부장리 고분처럼 충청도나 전라도 토착세력들, 즉 마한사람들이 전통인 흙무덤(토광묘, 土壙墓, AD380~390년)으로 토광목관묘를 만들었고, 3호분은 백제 묘제인 횡구식석관묘(AD400~410년), 4~5호분은 횡혈식석실분(AD420~440년)을 사용했다. 즉 증조할아버지 때까지는 마한의 전통을 살렸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는 백제 돌무덤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백제는 세력을 남으로 확장하며 영토를 넓혀가고 있던 시기로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마한지역 토착세력을 위무시키고, 마한인을 북돋는 정책을 펼칠 때이다. 즉 백제가 마한을 정벌했다고 하나 직접 통치보다는 그 지역의 토착세력인 옛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해당 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이는 간접지배라는 뜻으로 백제 중앙정부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환두대도 같은 예기(위세품)를 하사해 이들을 결속했다.

이처럼 고고학계에서는 서산 부장리 금동관모는 한성백제에서 하사한 최고 수준의 위세품으로 당시 이 지역의 지배세력이 한성백제에 철과 소금을 공물로 바친 대가로 지역의 맹주로 부상할 수 있었으며, 한성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보고 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이훈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장 “부장리유적은 백제의 지방 통치제도와 관련돼 이해해야 하며 금동관모, 식리 등 중요한 유물이 출토된 이상 이들 세력이 백제 중앙세력에 대해 어느 정도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매는 백제에서 왕실의 상징

마한의 전통이었던 ‘새 숭배 사상’ 담겨

금동모관에 표현되어 있는 문양도 예사롭지 않다. 여타 금관모와 같이 서산 부장리 금동모관의 경우도 측판에 용 문양과 함께 서조(瑞鳥, 봉황)의 문양이 표현돼 있다. 이는 마한지역의 오랜 전통이었던 ‘새 숭배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노중국(사학) 계명대 교수는 ‘백제의 관:논고’(국립공주박물관)에 특별기고한 논문 ‘백제 관 장식의 상징성’에서 백제 금동관 장식의 유형으로 조익(우)형과 수지형(樹枝形·나뭇가지 모양)을 든 뒤 공주 수촌리 출토 금동모관의 조우형 장식은 비상하는 새의 모습, 특히 새 가운데서 백제 왕실의 상징인 매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밝혔다.

‘제왕운기’에 백제의 별칭으로 매를 의미하는 응준(鷹準)이 나오고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조’에 백제를 응유(鷹遊)로 표기하고 있는 게 바로 이를 말해 준다는 것. 노 교수는 “매는 백제에서 왕실의 상징으로 관념됐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계에서는 방물(方物)로도 이용됐고, 놀이문화의 하나로서 매 사냥은 귀족들과 민가에서 널리 애용됐다”고 강조했다.

서산, 마한54개국 연맹공동체중 하나인 ‘치리국국’지곡면 산성리 부성산 중심 지명 흔적 남아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을 뜻하며 기원전 2세기경에서 기원후 3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있던 정치집단을 말한다.

한반도 중부 이남의 토착사회는 각기 성장 발전하여 소국으로 성립되었고, 소국들의 성립시기와 지역에 따라 마한・진한・변한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에 의하면 마한은 54개,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마한은 대체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小國)을 가리킨다.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54소국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戶)가 된다고 한다. 각 소국에는 우두머리가 있는데, 세력의 대소에 따라 신지(臣智)․읍차(邑借)라 불렀다. 이들 소국은 다수의 읍락(邑落)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심 읍락인 국읍(國邑)은 각 읍락간의 물자교역의 중심지이고, 국읍의 주수(主帥)는 대내외 교역활동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 읍락을 통솔하고 유사시에는 군사활동의 지휘권까지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 마한 54개국중 하나인 치리국국(致利鞠國)은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에 비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대체로 서산의 지곡면에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흔적으로는 지곡면 산성리 부성산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 부족국가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지명들, 즉 대궐재, 망군말, 둥령당이, 옥터밭, 왕산이, 쇠팽이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중 치리국국(致利鞠國)의 국명에서 ‘리국(利鞠’을 반절로 표기하면 ‘륙’이 되므로 ‘치리국’은 ‘치륙, 지륙(知六)’이 된다. 이는 백제의 지륙현(知六縣)이 되었고, 신라에는 지육(地育)으로 고려시대에는 지곡현(地谷縣), 즉 지금의 지곡면이라는 지명이 정해진 과정이다.

백제국(伯濟國) 마한에서 성장하다

3세기 말 고이왕 집권 서산 백제에 속하다

마한의 몰락과 백제국의 등장은 철기문화 유입과 그 맥을 같이 한다.

BC 1세기 이후 위씨조선계 유민과 문화의 유입, 철기의 보급, 부여계 유이민 집단의 정착 등의 정치 문화적 변화 속에서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권이 형성됨에 따라 청동기문화 단계의 마한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후부터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 지역은 한강 유역의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와 목지국(目支國) 중심의 토착세력권이 병존하는 상태였으며, 이후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가 점차 마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편제 질서를 확립해간 것이다.

한강유역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마한 54개 소국중 백제국(伯濟國)은 세력을 점차 확대 3세기말 고이왕(백제의 제8대 왕, 재위 234∼286) 시기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영역 확대를 도모하여 북으로는 패하(예성강), 동으로는 주양(춘천), 남으로는 웅천(안성), 서로는 대해(서해)에 이르렀다. 서산을 비롯한 충남 지역 마한의 소국들도 이 시기에 백제에 통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4세기에 들어오면서 백제의 영토확장은 가속력을 받는다. 전북지역의 마한연맹체를 장악하면서 중국과의 교섭에서 백제라는 국호를 당당히 사용하였다. 이 시기는 근초고왕 시기로 근초고왕은 종래 이원적인 관등체계를 좌평을 최고위로 하고 솔(率)과 덕(德)을 분화시켜 일원적인 14관등체계를 만들었다. 또 담로제라고 하는 지방통치조직을 편제하여 지방관을 파견해 영역을 직접 지배하였다.

371년 겨울에 근초고왕은 친히 3만의 精兵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는 승리를 거둔 후 신계지역까지를 확보하였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 최대의 영역을 확보하여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 시기 백제의 천하관은 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석상신궁(石上神宮)에서 보관하고 있는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명문의 내용은 백제는 태화 4년(369 : 근초고왕 24)에 이 칠지도를 만들어서 왜왕에게 주었다는 것, 이 칼은 백제 왕세자의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왜왕의 이름은 지(旨)라는 것, 이 칼은 백병을 물리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는 것, 이 칼은 백번 담금질하여 만들었다는 것 등이다.

이 명문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을 제후왕(諸侯王)으로 관념하였으며, 이 칼을 만들어 왜왕에게 주도록 한 주체는 왕세자였다. 이는 백제왕이 왜왕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로서 왜왕을 제후왕으로 인식하고 자신을 대왕의 국가로 관념하였음을 보여준다.

박두웅 기자 simin1178@naver.com

※이 취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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