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홍(자유기고가, 향토사가)

서산시 읍내동 부영아파트 앞 공원 아래에 위치해 있는 서원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성암서원은 고려말 공민왕 시기의 문신인 사암 유숙(思菴 柳淑)과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학주 김홍욱(鶴洲 金弘郁)의 위패를 배향한 서원이다. 1719년(숙종 45년)에 건립되었고 1721년에 임금으로부터 서원의 현판과 서적 및 노비를 지급받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1729년 (영조 5년)에 사액이 철액(撤額)되는 불운을 맞았으나 1750년(영조 26년)에 복액되었다. 그리고 다시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성암서원 자체가 철폐되기에 이르지만 1924년에 서원을 재건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49년도에 서원을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이후 낡은 건물을 1988년도에 당시 서산군의 예산을 들여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리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서로 마주보고 있도록 건물을 배치하였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우측에는 성암서원 중건비(聖巖書院重建碑)가 세워져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내삼문(內三門)과 사괴석 담장으로 구획된 고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위치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성암서원 관련 자료로는 성암서원지(1966)와 학주 김홍욱의 학주집이 있다. 성암서원지에는 서원의 연혁과 관련자료 등이 기록되어 있어 서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을 모시고 있으며, 사암 유숙과 학주 김홍욱은 서산의 대표적 인물로서 다음과 같다.

 

-유 숙(柳淑)

유숙(1316-1368)은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서령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菴)이다. 134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사록(安東司祿)이 되었으며 대군시절의 공민왕을 시종하여 4년간 원나라에 머물렀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에 돌아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이듬해에는 연경에서 왕을 보좌한 공으로 연저수종(燕邸隨從) 1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어 우대언,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다가 조일신의 무고로 파직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일신이 죽은 뒤에 다시 기용되어 1356년에 추밀원 학사(樞密院學士)가 되었다.

그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에 임명되었고 1359년에는 지추밀원사로 기철일파를 제거하는데 세운 공로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어 추밀원사에 까지 이르렀다. 이해 겨울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에게 권하여 남쪽으로 피신하게 하였고 이어 한림학사 승지수국사를 역임하였으나 안우 등의 위협으로 한 때 동경유수로 나가기도 하였다.

1363년 홍건적의 난 때의 공으로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기용(金鏞)이 변란을 이르켰을 때 공을 세워 감찰대부가 되어 1등 공신에 책록 되었으며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에 올랐다.

1365년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영광에 유배되었으며 그래도 못미더워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성암서원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김홍욱(金弘郁)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의 호는 학주(鶴洲)이며 자는 문숙(文叔)이다. 본관은 경주로 서산의 대표적 성씨 중 하나이고 아버지는 김적(金積)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 때 진사에 급제하고 1635년 중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임금을 호종, 청나라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기로 유명하며 당진현감으로 재직시에는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사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646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권신 김자점과 불화로 또 사직하였다. 학주 김홍욱은 관기숙청과 민생고 등의 해결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매우 청렴한 인물이었다.

1648년에는 관기(官紀), 전제(田制), 공물(貢物), 방납(防納) 등 시폐 15개조를 상소하였다. 효종 즉위 이후 집의승지를 거쳐 충청도에 대동법을 처음 실시하는데 적임자로 지목되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654년 황해도 관찰사로 전임하였는데 흉년이 들어 효종이 원인을 묻는 구언교(求言敎)를 내리자 사사(賜死)된 강씨(소현세자 빈)의 억울함을 말하고 그 원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보전과도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바 있던 일을 다시 거론하자 효종이 격노하여 친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결국 장살(杖殺) 당했다.

그 후 1718년에 민진후의 주청으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문정공(文靖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대산읍 대로리에 분묘가 있고 우암 송시열의 찬문으로 된 신도비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서 있다. 문집으로는 학주집(鶴洲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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