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관 서산시의회 의원

달포 전에 어느 지인이 나에게 카톡으로 ‘장사익의 꽃구경’이라는 애닮은 노래의 동영상을 보내줘 감상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그 노래를 듣고 장사익이라는 가수가 제정신이며 역사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개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늙으신 어머니를 꽃구경 가자고 하면서 지게에 지고 깊은 산속에 유기하러 가는데 눈치 채신 늙으신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가는 길에 길을 잃을까봐 솔잎 가지를 꺾어 표시 해둔다는 내용이다. 우리도 언제 부턴가 출처 불명의 고려장이란 풍습으로 알고 있었다. 필자도 과거에 역사 공부를 하면서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정말 고려장이란 풍습이 있나, 의심을 갖고 관련서적을 찾아도 보고, 역사에 조예가 깊으신 분 하고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놈들이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고자 고려장이란 없는 풍습을 존재해온 풍습으로 날조해 일제강점기에 주입시켰다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이런 내용으로 가사를 만들어 애달픈 멜로디와 믹스시켜 우리 스스로가 열창하는 게 한심스럽고 딱하기도 했다.

부모에 대한 ‘효’란 동, 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것이며 도덕규범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자녀가 지켜야 할 근본 도덕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효’사상이 전개된 과정은 교육 기관을 통해 ‘충’ 사상과 아울러 고취되어 왔다. 따라서 ‘충’은 국가 차원의 윤리라면 ‘효’는 가족사회를 바탕으로 한 윤리라 할 수 있다. 그 유래는 <고구려>에서 최초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소수림왕 2년(372) 중앙에 설치된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서는 오경과 중국의 사서들을 상류 계급의 자제들에게 교육하였다. <백제>의 경우는 교육 기관을 통해 유학 교육을 실시한 문헌상의 기록은 없지만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했다고 나와 있다. <신라>의 경우는 지증왕(437∼514) 때에 ‘왕’이라는 호칭과 상복제(喪服制)를 사용했고, 유학 교육기관인 국학에서는 논어와 효경 등이 필수 과목이어서 ‘충효’ 교육이 실시되어 왔다고 한다. <고려시대> 역시 최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학습하고, 상·중·하 3품에 걸쳐 논어,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하였다. 이를 볼 때 유교적 ‘충효’ 사상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에 편찬된 중국 고전 효경, 논어, 맹자 등 에서 엮은 명언집인 명심보감은 유학적 ‘효’ 사상의 내용인 수신서도 있다. <조선시대>는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삼강오륜에 힘쓰게 되었고 주자학을 지도 이념으로 충효사상을 국민에게 널리 보급하고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세종 13년(1431)에는 설순(偰循) 등이 편찬한 ‘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는데 이는 효가 정치적·사회적 질서의 근본 규범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 이황의 효사상과 율곡 이이선생님은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는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는 우리 자식들은 부모에 대한 ‘효’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듯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에 일본 놈들이 대한민국의 ‘효’에 관한 사상을 패륜사상으로 날조시켜 한국인에 주입시킨 출처불명의 풍습을 입에 담지도 말고 ‘효’의 본질을 재인식하고 그 참된 가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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