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웅 편집국장

어느 글을 읽다가 '답정너 교육' 이라는 단어를 보며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요즘 하두 약자나 속어가 난무하니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았지만 도무지 알수가 없다.

글 말미에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친절한 설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학교. 담임교사가 반장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반장, 너 가서 야자시간 떠드는 애들 이름 좀 적어 와라.”

그러자 반장이 얼굴을 붉히며 바로 대꾸한다.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반장을 선생님이 뽑아 준 것도 아니고, 저를 반장으로 선출해 준 것은 우리 반의 학생들입니다. 반장은 반의 학생들이 공부와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대표성을 가진 위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생님의 프락치나 간첩도 아니고, 저를 뽑아 준 친구들이 졸거나 하면 그 이름을 가져 오라고 하다니요? 담임선생님으로서 부당한 명령 같습니다. 교육적 가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철회하셔야 합니다.”』

아마도 이런 일들은 상상속에서나. 아니면 영화속에서나 나오는 어느 유럽의 자유학교 풍경일것이다.

우리에게 ‘떠는 애들 이름적기’는 학창시절 흔히 있었던 추억이다. 지금이야 깔깔거리며 추억꺼리로 이야기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리 간단치 않다.

그런 학생이 기성세대가 되어서 장관, 국회의원, 총리를 할 경우에 자신을 선출해 준 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까? 담임에게 잘 보이기 위한 반장질에 익숙한 아이들이 커서 권력자 앞에서도 잘보이기 위한 행위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답정너’를 양산하는 교육에 물든 우리들에게 비판적 사고는 존재하기 쉽지 않다. 철저히 경쟁하게 하면서 이기주의에 물들고 그 어떤 힘을 가진 이들이 묻는 말에만 답을 잘하게 하는 훈련. ‘반장질’을 훈련받으면서 힘을 가진 이에게 종속되도록 배운 탓이라 생각하니 씁쓸하다.

또 요즘 10대, 20대 청년들이 집중하는 일이 ‘스펙쌓기’이다. 대학입학을 하거나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학력·학점·토익 점수 따위를 합한 것을 ‘스펙’이라 한다. 물건도 아닌 사람에게 어떤 사양이냐고 묻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답정너’에 ‘스펙’으로 규정되어지는 요즘 교육현장. 교육을 백년대계라 하는데 어쩌면 교육은 백년이 흘러도 변하기 쉽지 않다는 역설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사회개혁, 정치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정작 교육개혁에는 지지부진하고 소홀한 우리들. 올 가을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작은 관심이나마 가져보려 한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