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손칼로 좌측 귀 자르고
1919년 혈서로 태극기 그리고, 격문 써 민족의 의거(義擧) 촉구

634번 지방도로인 성연면 일람리 사거리에서 팔봉면 덕송2리 까지 구간을 신도로명 ‘한월당로’로 부른다.

팔봉산 산행을 하거나 이 길을 통해 구도항을 가는 길손들은 도로명 표지판에 쓰여있는 ‘한월당로’에 자못 궁금해진다.

▲ 한월당 김상정 선생의 묘소

하지만 634번 지방도로 중간쯤인 고남1리 정류장 150미터 근처에 독립운동가 김상정 선생의 묘가 있고, 그 김상정 선생의 호가 ‘한월당’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김상정 선생은 1875년 고종 12년 아버지 김덕재(金德載)와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명옥(明玉), 호는 한월당(寒月堂) 또는 곡천(谷川) 이다. 한월당 김상정 선생의 기록은 그가 저술한 한월당집(寒月堂集)과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인물록, 독립유공자공훈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들 김홍제(金洪濟, 1915~2010)씨의 말에 따르면 한월당 김상정은 경주 김씨로 1875년 음력 9월 12일 당시 서산군 음암면 유계리에서 출생하였고(공식 자료에는 부석면 칠전리 출생), 남당 한원진의 학문을 계승(남당학파) 선대 한간(寒澗) 김한록과 월담(月潭) 김일주의 호에서 한자씩 취하여 한월당이라 칭하였다.

▲ 한월당로 김상정 선생 존영

호서의 명문가에서 출생한 한월당 김상정은 남당학파 계열의 유학자로 고조인 한간 김한록과 종증조인 월담 김일주 등을 통해 내려온 호론적(湖論的) 학풍을 가학(家學)으로 계승하였다. 한월당은 삼강과 오상이 인간이 지켜야 할 대륜(大倫)으로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삼강 중에는 임금과 어버이를 중히 여기는 충과 효를 우선하고 오상중에는 인과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에게는 사람다운 학행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그는 삼강과 오륜의 마음이 왜적과 싸울 수 있는 의리가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학행의 근거로 공자의 말을 들어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 춘추대의라고 언명하고, 선비가 지켜야 할 것은 강상이며 행해야 할 것은 인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공자의 ‘살신성인’과 맹자의 ‘사생취의’, 주자의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 우암 송시열의 직사상, 남당 한원진의 기질의 중요성, 한간의 직의 정신이나 『시경』의 응징정신과 『소학』의 절의정신 등은 그에게 중대한 학행의 실천적 이념과 정신이 되었다.

이러한 학행의 근거에 따라 한월당은 단군 기자 이래로 조선에는 4천년 신성한 덕교(德敎)와 2천 년간 대성한 도학(道學), 5백 년간 가장 저명한 문명(文明)이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는 왜적이 침범한 이래로 덕교와 도학과 문명이 현저한 문화국인 조선의 자주권을 박탈해 감을 통분해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행의 근거에 입각한 춘추의 존양론(尊攘論)을 철저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배일론(排日論)으로 전개하며 포악한 일제에 항거하였다. 1919년 1월 22일 덕수궁(德壽宮)에 유거하던 고종(광무황제)이 갑자기 훙거(薨去)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혼자서 발상하였다.

같은 해 3월 23일 서산군(瑞山郡) 해미면(海美面)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面民大會)를 개최하였을 때 면민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倭王)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朝鮮總督)에게 발송하였다.

9월 12일에는 면서기(面書記)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倭王) 대정(大正)은 한국(韓國)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기도 하였다.

2년 후인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金商玎)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靑陽駐在所)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한월당은 광복 후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의 참수를 주장하는 혈서를 써 그 기개를 떨치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 그의 혈서인 할체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金九)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최기현 고남1리 노인회장은 기억을 뒤살려 "김상정 선생은 부석면 칠전리에서 잠시 살다가 성연면 고남1리로 돌아와 인재육성을 위해서 서당을 운영하여 한문을 가르쳤고, 본인도 1950년 6.25때에는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전하였다.

한편 김상정 선생은 노환으로 80세에 별세하여 고남1리 선영에 묻혔다. 김상정 선생의 증손자인 서산시청 공보실 김준환 미디어팀장은 “할아버지는 한 평생 동안 독립운동만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언제나 마음속으로 독립운동가의 가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에서는 고인이 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여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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