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희생자 위령제...소설 '만다라' 작가 김성동

▲ 소설가 김성동 작가

"왜 인간은 죽어야 하는가? 그것도 자의가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소설 만다라(曼茶羅, 1977년 한국 문학사 발행)에서 주인공 '지산'은 노승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산의 아버지는 좌익 혐의로 형무소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던 중 6.25가 터지자 다른 좌익들과 처형됐다. 시체도 못 찾은 할아버지는 울화로 돌아가셨다. 지산은 묻는다.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너무 허무하고 슬픈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요?"

기자가 소설 속 지산의 가정사가 작가 김성동(金聖東. 70) 개인사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곳이 대전형무소였고, 지산의 아버지가 끌려가 묻힌 곳이 충남지역 보도연맹원들이 끌려간 대전 산내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7일 오후. 김성동 작가가 대전 산내 희생자 위령제에 처음으로 다른 유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평 옥천면 골짜기에서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꼬박 5시간을 걸려 온 길이다. 유가족들 틈에 앉은 그는 "감개가 무량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위령제 참석은 처음이지만 홀로 산내 골령골을 찾은 건 헤아릴 수조차 없다. 1983년에는 산내 골령골 주변 구도동에 흙집을 사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매일 향을 피웠다.

김성동이 말했다.

"소설가를 한 것 자체가 아버지 때문이었어. 산내 때문에 소설가가 됐어. 아버지가 아니면 문학을 안 했어. 왜 죽어야 하냐며 '죽음'에 대해도 묻지 않았을 거야"

그가 네 살 때인 1948년 12월 중순 무렵이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지 석 달 후였고, 4.3 제주 항쟁이 일어난 지 여덟 달 만이었다. 아버지(김봉한)가 아들인 김성동을 보기 위해 집(충남 보령)으로 숨어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잠복하고 있던 경찰이 아버지를 덮쳤다.

"아버지를 잡은 경찰은 보령 경찰이 아니야. 몇 달째 잠복하고 있던 서울시경 특별경찰대 소속이었어. 이 사람들은 우익 서북청년단원들이야. 4.3 제주항쟁 때 양민들을 학살한 공로로 특경대에 뽑힌 서북청년단원들이 많았어. 또 공을 세우려고 아버지를 잡으러 내려온 거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아버지 김봉한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2심을 기다리는 중 한국전쟁이 터지자 산내로 끌려가 총살됐다. 당시 아버지는 34세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어. 해방 후에는 전국농민동맹충남지부 대표를 맡았어. 아마 통일정부를 위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만들려는 이승만 정부를 반대했던 모양인데 재판 기록이나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 또한 모진 고문을 받았다. 아직도 고문 후유증을 안고 살고 있다. 그의 큰삼촌은 우익청년단원들에게 맞아 죽었다.

이후 김성동의 삶은 격변했다. 1958년 쫓겨나듯이 대전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1964년에는 출가했다. 그는 이를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 취업하듯 위장 입산했다"고 말했다. '빨갱이의 자식'은 3불'(공무원, 장교, 고시)의 덫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작가 중에는 빨갱이 아버지를 둔 사람들이 많아. 대부분 아버지를 원망하며 '반공 작가'가 됐어. 난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리움에 안타까워하며 삶을 복원하려 했어."

소설 <만다라> 이후 1980년대 초 <문예중앙>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풍적>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글이 연재되자마자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6.25 민족 수난사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 중 최고봉'이라는 문단의 평가가 이어졌다. 하지만 2회 만에 연재가 강제중단됐다. 약속이나 한 듯 청탁도 끊겼다. 정부의 비공식 탄압이었다.

그는 한동안 아버지 얘기를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2013년 3월. 막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글을 썼다.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박근혜 대통령님께!' 제목의 글에서 "시방도 백골이 튀어나오는 산내 골령골을 평화공원으로 만들어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의 눈을 감겨달라"고 했다. 그가 대통령과 정부에, 아버지 이름을 내밀고 내건 첫 요구였다.

"회갑 때까지는 스스로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있었어. 회갑이 지나고부터는 '아버지보다 곱을 살았다, 이제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아버지 얘기를 차분하게 글로 쓰고 표현할 생각이야. 민족수난사를 글로 쓰고 표현해 힘을 주고 싶어."

올 상반기 제1회 이태준문학상 수상작으로 그가 쓴 단편소설 <민들레꽃 반지>가 선정됐다. 남로당과 전쟁 이야기로 주인공은 구순의 그의 어머니다.

최근에는 <고추잠자리>라는 중편 소설을 썼다.

"아버지 얘기야. 불현듯 쓰기 시작했어. 일주일 만에 번개같이 썼어. 쓰면서도 내가 쓰는 게 아니라 불러주는 대로 받아쓴다고 생각할 만큼 막힘이 없었어. 혼령들이 날 부르는구나 했지. 평생을 글을 쓰지만 이런 일은 흔치 않아."

그는 이날 유가족 앞에 섰다. 한지에 또박또박 붓으로 쓴 긴 추도사를 읽은 후 희생자 영전에 올렸다.

"아 아버지시여! 못난 자식이 올리는 깨끗한 술잔을 음복하소서!"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