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봉면 양승현 의용소방대장의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전쟁 때 죽창으로 목숨 잃어...국가보훈처 유공자 등록 안 돼

“아버지는 팔봉면 초대 의용소방대장을 맡았던 양승현인데 6.25전쟁 때 경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동네 좌익 주민들에 의해 돌아가셨지.”

양승현 대장 외아들인 팔봉면에 사는 양 근(69)씨는 아직도 어렴풋이 당시 기억이 조금씩 남아 있다고 한다.

6.25 전쟁시 의용소방대는 1939년에 창설된 소방·수방·방공업무를 하는 경방단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양승현 의용소방대장도 전쟁당시 방공업무를 주로 맡아 팔봉지서에서 경찰을 보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 당시 서산경찰서 팔봉지소는 지금의 어송1리 면소재지에 있지 않았고, 구도항(호3리)에 있었다.

당시 네 살이었던 양 씨는 “인민군이 서산지역을 점령 하면서 팔봉지서 지하실에 숨어 있었던 아버지는 좌익들에 의해 끌려 나와 총살이 아닌 죽창으로 희생되었다”고 무겁게 닫혀있던 말문을 열었다.

“네 살배기 나까지 죽이려 했지. 다행히 어머니의 애원으로 발에 죽창의 상처만 남기고 지곡으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지.”

“(그들은) 작은 아버지도 죽이려고 했는데 아버지를 죽인 뒤라 좀 누그러졌는지 위기를 면할 수 있었지.”

당시 네 살이었던 그는 당시 상황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서산군의 경우 1950년 7월 18일부터 9월 30일경까지 인민군 3개 연대가 서산경찰서에 주둔하였다. 당시 서산 지역의 지방 좌익들은 인민군과 노동당의 지도하에서 군청과 경찰서 등을 장악한 뒤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이 당시 북한 정권은 군·면 단위의 노동당과 인민 위원회 조직, 또는 청년 동맹, 농민 동맹, 여성 동맹 등 각종 정치·사회단체를 조직한 뒤 이를 매개로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핵심 내용으로 한 북한식 토지 개혁, 8·15해방을 기념한 궐기 대회 형식의 인민재판, 징병과 전쟁 물자 징발 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당시 인민군과 좌익세력은 대한청년단원, 공무원, 경찰공무원과 가족 등을 학살하고 심지어 여자까지 경찰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대상에 포함시켰다.

소원면 부면장 김성용 씨, 전직 경찰이었던 이창영 씨, 의용소방대였던 심형섭 씨 등도 서산내무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양대리에서 총살 혹은 창으로 척살되었다. 심지어 박종혁 씨는 집안이 부유하다는 이유로. 박홍진 씨는 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중부신문에서는 전쟁 중이라 다소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700여명에 달하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기록에 의하면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의 학살은 서산시 177명, 태안군 156명 모두 333명이 희생되었다. 지금도 서산시 수석동 소탐산 자락에는 당시 희생된 300여 명 중 28구가 안치돼 있는 ‘반공호국희생자 합동위령탑’이 있다.

양승현 대장도 ‘반공호국희생자 합동위령탑’에 아픈 역사를 뒤로한 채 이름이 올라 있다. 하지만 양 씨는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추천하였으나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6.25 전쟁 발발 66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서산지역에는 좌·우익 간의 3차례의 집단학살의 상처와 갈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도 메지골, 소탐산, 양대동, 갈산동에는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영령이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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