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렬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 장군 석남동 은행나무 아래에서 무술 익혀

서산시에서 550년 된 송곡서원 향나무 등 보호수로 지정돼 관리되는 나무가 2016년 기준 총 91그루에 달한다. 도에서 지정돼 관리되는 나무는 송곡서원 향나무, 해미읍성 호야나무, 운산면 여미리 비자나무 3그루이다.

지난 2010년 7호 태풍 '콘파스'때 보호수들이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송곡사 주위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뿌리채 뽑히거나 부러졌고, 부석면 강수리 향나무, 팔봉면 덕송리 느티나무 등 보호수가 일부 훼손되기도 하였다.

당시 음암면 신장리 모감주나무 큰 가지가 강풍에 부러져 작은 가지만 살아남아 있고 현재는 상처 난 곳에는 시멘트로 덮어져 주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래도 부석면 지산리 배나무는 긴 역경을 이겨내고 요즘 새싹이 한참 돋아나고 있어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보호수들은 오래된 나이만큼 사연이나 전설 등을 지닌 경우가 많다.

팔봉면 덕송리 느티나무에서 일제히 싹트면 풍년이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을 점쳤다. 또 이 나무에 아낙네들이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많이 낳는다는 소문이나 소원목이 되었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 무사 안녕제’를 지내거나 전염병이 유행하면 병마와 액운을 물리치는 제사를 이 느티나무에서 지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서산시는 고목, 사연 있는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산림보호법 제13조에 따라 보호수를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난 5일 식목일을 맞아 서산시에서도 수많은 새로운 나무들이 심어지고 있지만, 어린나무들을 새로 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수백 년 된 나무들을 보호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

서산시 산림공원과 조병진 과장은 ‘사람은 장기적 안목에서 인재를 육성하듯이 나무도 사람의 미래와 함께 해야 하는 소중한 재원이므로 열심히 심고 가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지역민과 함께 해온 보호수는 우리들의 역사와 문화재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 소중하게 여기는 시각이 필요하다 하겠다.

 

해미읍성 내 회화나무

천주교 신자 박해의 아픔 전해

본래 회화나무는 학자나무로도 일컬어지며,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겨져 왔다. 때문에 궁궐이나 서원 혹은 명문 양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안의 회화나무는 그 상징적 의미에 걸맞지 않게 고문과 사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서산 지역의 사투리인 호야나무로 더 유명한 이 고목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묶어 두었던 철사 자국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기에 천주교 신자를 매달아 고문하거나 처형하는 데 사용된 고목이다. 서산 해미읍성 옥(獄)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감옥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취조와 회유, 고문이나 처형이 행해지기도 하였는데, 옥 앞의 회화나무도 이러한 사실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현재 옹이만 남은 동쪽 가지에 굵은 철사를 매어 놓고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기도 하였으며, 배교를 거부하던 신자 가운데는 회화나무에서 그대로 교수된 사람도 있었다. 그 이후로 회화나무를 교수목(絞首木)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고매한 선비를 상징하던 옥문 앞의 회화나무는 형벌의 도구이자 박해의 상징인 ‘호야나무’가 되었다.

 

여미리 비자나무

제주도에서 흙과 함께 옮겨 심어

수령 약 340년으로 추정되는 비자나무로, 여미리 마을회관 뒷산 언덕에 있다. 운산면 여미리 비자나무는 이 마을 재지사족인 예민 이 씨와 관련 있는 나무이다. 비자나무는 입향조 이창주의 증손인 이택(1651~1719)이 1675년 현직에 있을 때 제주도의 비자나무를 흙과 같이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이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산 여미리 비자나무는 수령 340년, 둘레 246cm, 높이 20m, 중부이북에서 잘자라지 않는 나무이다.

이론적으로는 동해안 강릉-금남정맥 아랫쪽(무진장아래 부여 공주 등)-서해안은 서산까지가 난대림의 북방한계선이다. 쉽게 말하면 비자림이 자랄 수 있는 한계선에 있는 나무다.

 

송곡서원 향나무

조선조 단종 폐위에 얽힌 사연

 

조선전기 서산출신 선비 유윤(?~1476년)이 단종의 폐위를 보고 낙향하여 심은 서원 앞 마주보고 있는 두 그루의 향나무는 15m 높이에 둘레가 2.9m에 수령 550년을 자랑한다.

보통 서원이나 향교 하면 은행나무를 생각하게 하지만, 이 곳 만큼은 향나무가 특이하다. 불의에 저항한 이의 강직함이 보호수를 통해 전해 온다.

 

석남동 은행나무

서산 정씨(瑞山鄭氏)의 시조 정신보(鄭臣保)가 심어

석남동 은행나무는 남원마을에 있는데, 남원은 행정 구역상 서산시 석남동에 속하는 마을이며, 남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원’이란 옛날 원 제도에서 연유된 명칭으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 역과 역 사이에 두었던 관원을 위한 국영의 여관이 있던 곳을 말하며, 실제로 서산시 석남동 남원마을은 서산 지방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서산시 석남동 남원마을의 은행나무는 서산 정씨(瑞山鄭氏)의 시조인 원외랑(員外郞) 정신보(鄭臣保)가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귀화하여 서산 지역에 살 때 심은 것이라 한다. 서산의 위인으로 알려진 양렬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 장군은 정신보의 아들인데, 은행나무 아래에서 무술을 익혀 고종 말엽에 침입한 몽골군을 크게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정인경의 공로를 높이 사서 일시 폐군시켰던 부성군을 서산군으로 개칭하여 복속해 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은행나무 밑에 있는 바위 위에는 말발굽 자국이 있는데, 그때 말을 타고 훈련하던 흔적이라 전해진다. 또한 예부터 그 바위나 은행나무를 훼손하면 재앙이 따른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매년 7월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마을의 안녕과 각자의 소원 성취를 빌기도 하였다.

 

서산향교 은행나무

호산록(湖山錄)』한여현이 심은 나무

 

서산향교(瑞山鄕校) 은행나무는 수령 460년의 암그루로, 1406년(태종 6)에 건립된 서산향교를 1574년(선조 7)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울 때 옮겨 심은 것으로 추정되어 서산향교와 역사를 같이하는 나무이다. 연원에 대해서는 한여현(韓汝賢)이 1619년(광해군 11)에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지인 『호산록(湖山錄)』 향교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서산향교 은행나무는 서산향교를 옮길 때 한여현의 선인이 심은 은행나무 네 그루 중 한 그루로 추정된다. 은행나무에서 해마다 수확하는 은행이 두 가마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서산향교 은행나무는 유주(乳柱)가 있는 희귀종 은행나무로 그 보존 가치가 높고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율목리 느티나무

서울, 인천 내왕인들의 안녕 빌어

 

율목당산수 서낭제는 수백년 동안 보존되고 있는 느티나무로 옛날 서울, 인천 내왕인들이 돌무덤에 절을 하고 안녕을 기원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 1구 모과울은 서산에서 당진 정미장으로 가는 큰길이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매년 치러지는 서낭제도 올해로 57회를 맞았다. 지난 3월 9일 음암면 율목리 서낭제 본존회(회장 심걸섭)는 서낭제와 함께 유래비와 어린이 동요의 대명사인 윤석중 시(詩)비 제막식을 가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용장리 느티나무

음암면 부장리 느티나무와 함께 수령 600년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에 있는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 용장리 느티나무는 용장리 장터 가운데,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30여 년 전까지 주변의 4개 마을에서 공동으로 장승제를 지낼 때에는 ‘중앙맥이’를 하던 곳이라 하지만, 현재는 장터 구석에 서 있는 고목나무일 뿐이다. 1927년에 발행된 『서산군지』에는 “용장리 느티나무는 마을에서 관리하는데, 나무의 높이는 50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유정 느티나무 군

서산팔경의 기억만 남아

양유정(梁柳亭)은 옛날 정자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은 공원내에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느티나무들만이 남아 있는데, 이들 느티나무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양유정에 관한 옛 기록은 1927년에 발간된 『서산군지』 중 서산팔경(瑞山八景)에서 확인된다. 기록에 의하면, 서산의 팔경 중 ‘유정쇄연(柳亭鎖煙)[양유정에 자욱한 물안개]’이 당시의 서공원(西公園)에 있다고 하였다. 전언으로 조선 시대 선비들의 놀이터였다고 내려올 뿐 이전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한편 1925년 양유정 주위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1990년대 양유정 옆으로 흐르는 명림천이 생활 하수로 오염되자 복개 공사를 하였고, 이 때문에 물길이 끊겨 더 이상 ‘유정쇄연’은 볼 수 없게 되었다. 2009년에는 노후된 정자를 철거하고 새롭게 정자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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