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 홍(자유기고가)

우리고장 서산에 운하가 있었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서산에 굴포라는 운하가 있었다. 굴포운하는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와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 사이의 서산시와 태안군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는 운하유적이다. 가로림만 - 팔봉 솔감저수지 – 팔봉중학교 북사면 – 폐교된 고성초등학교 북사면 – 태안 인평저수지 – 천수만으로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안흥량(지금의 태안군 근흥면 안흥 앞 바다로 좁게는 지금의 관장목을 지칭함)의 수로가 험난하고 또 암초로 인해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을 수도 한양으로 운송하는데 있어 선박이 전복되고 암초에 파손되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남으로 인해 이를 방지하고 거둔 세곡의 운반하는 시간을 단축하고자 지금의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운하를 파고자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굴포운하 건설은 고려시대 인종(1134)때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태조실록에 고려 예, 숙종조에 운하개착과 관련하여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도 논의 및 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그런데 이 굴포운하의 특이한 점은 단속적이기는 해도 고려와 조선에 이르는 약 500여 년 간 운하개착 공사가 있어왔다는 점이다.

이는 굴포운하의 필요성을 반증해 준다. 얼마나 필요했으면 500여 년의 기간 동안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서 여러 차례 시도되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세곡미의 안전한 운송에 있다.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세곡미를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성까지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한양까지 조운선에 실어서 운반해야 했는데 안흥량이라고 불리는 태안군 근흥면 안흥 앞 바다가 물살이 너무 세고 거칠어 이곳을 통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기 어렵다 하여 한동안 난행량이라고 불렀는데 안전한 세곡미 운송을 기원하는 뜻에서 안흥량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고려나 조선의 국가 재정은 결국 세곡미에 달렸는데 안흥량을 지나던 조운선이 좌초되고 침몰하자 이의 해결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운하건설인 것이다.

그런데 운하를 개착해보니 땅 속에 화강암 암반이 있어 당시의 정과 망치 등의 도구로는 개통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흙으로 되어 있어 공사가 가능했던 곳도 밀물과 썰물이 해수욕장 모래 쓸고가듯 해서 운하의 유지관리가 불가능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일종의 갑문식 운하인데 오늘날의 갑문식은 아니고 고도 차이에 따라 굴포운하의 물길을 몇 개의 댐으로 막아서 인공 저수지를 만든 후 각 저수지에 조운선보다 작은 선박을 띄워 놓고 몇 번에 걸쳐 배에서 배로 옮겨 싣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비효율로 굴포운하는 결국 폐지되기에 이른다. 이후에 굴포운하의 남쪽 끝과 북쪽 끝에 남창과 북창이라는 창고를 짓고 남창에서 북창까지 인력으로 운송하였으나 이 역시도 관리의 부정과 비효율성으로 중단 된다.

이렇게 굴포운하는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우리고장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오늘날의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실로 대역사가 시도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지역의 자긍심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