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의 전통풍어제 ‘창리 영신제’...마을의 안녕과 풍어 기원

▲ 뱃기를 앞세우고 영신당으로 향하는 풍물패와 주민들

지난 10일 음력 정월 초삼일, 서산시 부석면의 반농반어(半農半漁) 지역인 창리 영신당에서영신제가 열렸다.

서해안 일대인 당진시 고대리 안성마을 및 태안군 황도리의 풍어제와 더불어 대표적으로 꼽히는 ‘창리 영신제’는 마을 어민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조기잡이 신으로 일컬어지는 임경업 장군을 당신(堂神)으로 제례를 올리는 행사다.

▲ 창리포구가 전성기일 때는 100개가 넘는 뱃기가 펄럭였다고 한다.

배영근 창리영신제 추진위원장은 “창리 영신제 개최로 어촌의 전통문화 계승할 수 있어 뿌듯하다”며 “앞으로 관광객 유치를 통한 지역주민 소득증대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 올해에는 창리 주민 장봉용 씨가 당주로 뽑혔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이완섭 서산시장, 장승재 시의회의장, 우종제, 유해중 시의원, 유병수 부석면장, 이장단 일동, 새마을지도자 일동, 우상득 농협조합장, 창리 주민과 관광객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

 

‘조기잡이 신’, ‘풍어의 신’ 임경업 장군

▲ 당산에 오르기 전 무당이 당산 입구에 주과포를 진설하고 부정풀이를 하고 있다.

요즈음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환경 파괴와 어족의 남획으로 서해안의 조기 씨가 말라버렸지만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서해안은 조기 어업이 번성했다.

어민들은 “임 장군이 황해를 건널 때 군사들이 찬이 없다고 하니 어디에서 가시나무를 가져다가 물에 넣으니 조기가 무수히 걸려서 반찬을 했다”는 등 조기와 관련된 임경업 설화와, 나라를 위해 충성하다가 역적의 흉계로 억울하게 죽은 영웅신화가 민중들에게 각인되어 임경업 사당을 세우고 조기잡이 나가기 전에 임경업 신에게 반드시 제를 올려 풍어와 안전을 기원했다.

임경업 장군은 조선 인조 때 무관으로, 일생을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분투한 충신이다. 병자호란 뒤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자 군사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 중국 땅으로 갔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조금도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 임경업은 김자점 등 부청파에 의해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모진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나라를 위해 충성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중 영웅에 대한 숭앙정신이 조기 설화와 함께 전해 내려오면서 지금도 전국의 바닷가에서 새해 정초만 되면 영신제, 동제, 동신제, 당산제 등의 이름으로 제를 올린다.

 

‘창리영신제’로 명맥 이어가

▲ 영신당에서 마을 어민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

창리영신제는 매년 정월 초사흗날 상당인 산신당과 하당인 영신당(靈神堂) 그리고 장승, 샘 등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위하여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당산 꼭대기에는 임경업 장군 내외를 모신 영신당이 자리해 포구를 지켜왔다. 대개의 당산이 그러하듯 이곳의 나뭇가지 하나만 건드려도 탈이 난다. 예전에 비하면 영험이 형편없이 추락한 오늘날에도 함부로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다.

섣달 그믐이면 생기복덕을 엄정히 가려서 부정없는 이로 당주를 삼는다. 당주는 부정을 피해 상갓집 문상도 가지 않으며, 추운 겨울에도 얼음물로 목욕재계를 한다. 마을지킴이를 받드는 일인지라 한 치도 마음 놓을 수 없다. 올해에는 창리 주민 장봉용 씨가 당주로 뽑혔다.

산신제는 정월 초이튿날(음력 1월 2일) 당주만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상당에서 노구메(산천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메밥)를 지어 올리고, 술 대신 공동 우물에서 뜬 정화수 세 잔을 바친다. 당주가 재배한 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 소지와 호당 개별 소지를 한 장씩 올려 준다. 제사를 마치면 노구메로 음복을 하고 자정 전후에 마을로 내려온다.

정월 초삼일 아침에 당주 집에서 당주 고사를 지낸다. 이때 선주들은 뱃기를 당주 집 앞에 세운다. 당주 고사를 마치면 술과 고기를 음복을 하고 잠시 쉬었다가 영신제를 지내러 영신당으로 간다. 이때 풍물패는 뱃기를 앞세우고 영신당으로 향한다. 당산에 도착하면 무당이 당산 입구에 주과포를 진설하고 간단하게 부정풀이를 한 뒤 당산에 오른다. 뱃기는 바다가 보이는 당집 앞에 세우는데, 창리포구가 전성기일 때는 100개가 넘는 뱃기가 펄럭였다고 한다.

▲ 당주 고사를 지낼 때 선주들은 뱃기를 당주 집 앞에 세웠다.

영신제를 모두 마치면 선주들은 뱃기를 들고 자신의 배로 뛰어가서 각자 당맞이 뱃고사를 지내거나 뱃기만을 꽂아 놓고 온다. 예전에는 당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배를 가까이에 대놓고 있다가 서로 먼저 뱃기를 꽂기 위해 앞을 다투었다. 뱃기를 먼저 꽂으면 그해 가장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하여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3년 서산 AB지구 간척 사업으로 인해 산신당과 장승이 없어지고, 어업이 쇠퇴하면서 당제의 규모도 크게 축소되었다. 현재는 어촌계의 주관으로 풍어를 축원하는 영신제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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