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윤모/청주일보 본부장

공인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인정한다는 뜻이며 공직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공인은 국가나 공공 기관, 사회단체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 뜻으로도 쓰인다.

공인(公人)은 사회에서 타의 모범이 돼야 하고 엄격한 규율과 모범이 요구되기도 한다.

외부로 들어난 공인에 대한 갈무리는 간단하지만 내면적으로 공인의 몸가짐을 가지려면 우선 남을 먼저 배려하고 내가하는 행동이나 언변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신중하게 생각해서 움직여야 한다.

조선시대 양반과 중인 상놈을 계급사회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내면을 보면 사회지위를 부여한 양반에게는 벼슬에 진출여부와 관계없이 평생을 사회 전체에서 공인 취급을 받았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지만 양반들이 목청을 가다듬어 글 읽기를 큰소리로 냈던 이유는 단순히 글공부에 도움을 주려고 한일은 아니다.

국가에서 사회 지도계층인 양반의 덕목가운데 하나로 일반 백성들에게 글을 읽어줘 깨우치라는 뜻으로 공부를 할 때 양반은 글 읽는 소리가 담 넘어 밖에 까지 들리게 소리를 질러줘야 했다.

그 이유는 길을 다니는 일반 백성들이 그 글귀를 듣고 임문과 인성을 깨우치라는 깊은 뜻이 있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래가 없던 대중을 생각한 공인의 덕목으로 양반들은 의무로 이행해 왔던 조선시대에 행해 졌던 관습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에 대한 덕목은 매우 엄격해 평생을 지켜내기에는 엄청난 개인의 고통이 내재돼 있기도 한 엄격한 관습이다.

조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가의(공자, 맹자 등) 학문을 발전시켜 유교가 정착되면서 학문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발전돼 사회와 병리화 돼 경직된 면도 있지만 당시 조선 사회의 흐름에는 동양적인 철학의 내면이 깊게 깔려 있었다.

조선이 쇠퇴하게 된 원인인 임진왜란이 나기 전 일본은 우리나라를 신성시 했었다.

조선시대 일본을 왜라고 비하했으며 왜인이 우리나라 땅을 처음 밟을 때 행해지던 의식은 존경한다는 의미로 땅에 엎드려 입맞춤하고 큰절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될 정도로 조선을 신성시 했었다.

이런 행위의 이면에는 조선의 학문과 학자들의 정신과 인성을 중시했었다. 특히, 조선의 도자기 등 경공업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일본의 경제 젓줄이며 선조들의 영원한 고향으로 조선을 신성시 여겼었다.

이렇듯 사회 지도층의 인성은 통념상 그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척도로 여기며 그 나라의 학문수준으로도 귀결되기도 해 사회지도층인 공인들의 철저한 도덕성과 첨렴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사회지도층의 의무는 더불어 사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 현대에 들어서 소가족적인 영향도 있지만 무리를 이루는 권력에 유착된 패거리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나친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학연, 혈연, 지연과 더불어 정당 내에서도 계파 또는 계보의 가르기가 어느 때 보다도 심해져 있는 상태다. 국민이 보기에는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오로지 권력과 금전의 위력이 판치는 세상이라고 믿고 있다.

내년 4·13 총선의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파당 정쟁과 전국 298개 지자체 기초의회들이 하반기 의장 선출을 둘러싸고 계파 간 또는 학·지·혈연이 연관된 각종 파열음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어 정치권 공인을 보는 국민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의회를 장악한 다수당이나 패거리들의 아귀다툼의 숫자놀음은 눈과 귀를 막고 싶은 소식들이 줄지어 들려오고 있다.

보수·진보를 떠나 유력 시민단체들도 니편, 내편 갈라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정부나 정치권의 정책 방향이 잘못된 일이라고 시민 모두가 지적해도 시민단체는 이득에 따라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침묵을 유지해 시민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자나 군자는 없어도 우리가 표준으로 삼을 만한 이시대의 공인은 현존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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