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주부‧서산시 호수공원11로 11. 106동 506호

파랑색 호스의 물을 찾아라!

 

아파트 물탱크의 저수위가 낮아져서 물을 더욱 절약하라는 안내방송이 오늘도 어김없이 거실에 울려 퍼졌다. 얼마 전부터 아파트들이 제한급수에 들어갔고 시민들은 이래저래 불편을 감수하고 있던 터였다.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우리 집은 전기시설이 좋지 않아 지하수 물이 자주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는 옆집 마당에서 호수를 연결해 큰 통에 받아쓰곤 했었다. 부모님이 모두 일하러 나가시기 때문에 밥하고 청소하는 집안일은 세 자매의 몫이었다. 물이 안 나오면 얼마나 불편한지 아주 일찍 깨달아서 인지, 이런 안내방송이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버무려져서 나에게는 더욱 의미 있게 들리는 듯하다.

보령 댐의 수위 문제가 사람들에게 회자될 즈음 남편은 지인들과 보령 댐에 다녀왔다. 댐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고 깜짝 놀라 말했었다. 장마가 끝났고 매해 반복되는 봄 가뭄까지 생각이 미치자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것은 흡사 IMF가 시작될 때에 이제는 전쟁직후처럼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이 올 거라며 사람들의 수군거리던 말에 긴장했던 그 막연한 두려움과 비슷했다.

물 부족 국가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문제였는데 이미 내 발밑까지 와 버린 것 같았다.

그때부터 물을 절약하는 방법들을 찾아보려고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화장실의 변기 물탱크에 수위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다 이런 관심 덕분이다. 화장실에는 재사용 물을 담을 들통을 비치해 뒀다. 설거지를 할 때는 대야에 물을 받아쓰며 재활용을 하고 거추장스러워 잘 쓰지 않던 절수 패달은 마치 생활의 달인처럼 기가 막히게 박자를 맞춰 쓰는 것이 재미있기까지 하다. 처음에는 상당히 놀랐다. 이렇게 물을 조금 써도 설거지가 된다니 그동안의 생활습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문제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쓰는 세탁기 사용이었는데 세탁물을 모아서 한꺼번에 세탁하고 배수호수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 재사용하기로 했다.

탈수 전마다 커다란 호수에서 퀄퀄 나오는 물이 주체가 않되 어이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들통과 큰 대아에 여러 통을 받고 그 물로 손세탁과 바닥청소를 했다. 남을 때는 화장실에 변기용 물로 큰 통에 모아뒀다. 물을 사용할 때 잠깐씩 틀고 잠궈 가며 쓰는 습관을 아이에게 가르치니 물 절약과 더 나아가 자원절약에 대해 가족들이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방송이나 캠페인에서 많이 나오는 내용들이라 물절수 재미 붙인 주부로서 또 어떤 물이 우리 집에서 낭비되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은 바로 정수기 파랑색 호스!

왜 이제 생각났을까? 정수될 때 걸러지는 물 호스를 배수관으로 돌리겠다는 초기 설치기사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알아보니 정수되는 물보다 그냥 하수관으로 내보내지는 물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집정수기 회사에 전화를 걸어 물 절수 관련해 불편하겠지만 호스를 설거지 통으로 빼달라고 하는 전화를 했다.

센터에서도 흔쾌히 기사님을 보내겠다고 했다. 설치 기사님 말로는 마실 물 1병을 얻기 위해서는 3병 반 쯤 파란호스로 하수관으로 내보내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실 물 뿐만 아니라 요리할 때도 사용되는 가정용 정수기에서 얼마나 많은 물이 버려진다는 것인가!

통에 받아보니 과연 보이지도 않게 버려지던 맑은 물들이 정수기 파란색 호스를 통해 맑은 물이 양동이로 한 통이나 흘러나왔고 그 양은 간단한 설거지를 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멀쩡하게 잘 쓰던 정수기를 최신형으로 비싸게 다시 살 수 없는 형편인데 이렇게 맑은 물이 받아지니 참으로 기특했다.

일반적으로 역삼투압 방식을 쓰는 많은 정수기들에게 해당 된다고 하는데 많은 정수기들이 역삼투압 방식을 쓰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신문기사, 엘리베이터 영상모니터, 아파트 방송실 등에서 꾸준하게 물을 아끼는 방법에 대해 홍보를 한다. 하지만 이 내용은 보지 못한 내용이다. 설치기사님께서는 가뭄이 들었기 때문에 호수를 빼달라고 전화한 사람이 아직은 없다고 하셨다.

개인이 생활용수를 절약해서 얼마나 절약이 될지 의구심이 든다면 할 수 있는 만큼씩 실천해 보시라고 말하고 싶다. 분명 놀랍고 재미있는 경험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하얀 눈으로 세상이 뒤 덮였다. ‘이 눈들이 모여 가뭄을 해결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봤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작은 소망들이 모인다면, 또는 작은 절약들이 모인다면 분명 가정 가뭄극복을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최악의 물 부족 사태를 막기 위해 많은 분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힘을 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 국민은 IMF 때에도 ‘금 모으기 행렬’ 이라는 희한한 방법으로 난국해결의 발판을 마련한 저력이 있음을 기억한다. 또한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가뭄대책들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모자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조금 불편할 뿐이다. 오히려 나에게는 앞으로 삶에서 큰 가르침의 기회가 된 올해의 가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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