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상 칼럼리스트

시대가 첨단을 걷고 구성원들의 욕구가 다양화되면서 요구되는 지도자상도 달라지고 있다. 소위 개발시대라고 말하여지는 시절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거창하게 색칠해 놓으면 훌륭한 지도자였다. 초가지붕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우리는 이를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라 마르고 닳도록 칭송을 하였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시민들이 직접 지도자를 뽑는 오늘날은 어떠할까? 눈부신 변화를 가져왔다. 시민들의 정치의식 수준도 높아졌고, 지도자들은 시민들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춰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시민이 주인인 시대다.
그러나 선택의 문제다. 폼새는 황홀하나 인품이 쭉정이고, 이력은 화려하나 비전이 없는 자격미달의 지도자를 세워놓으면 장밋빛 그림은커녕 지역의 망신만 초래한다. 삶의 질은 떨어지고 경쟁에서 뒤처지며, 내가 낸 세금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시민들은 고단해 질 수밖에 없다.
작대기만 꽂아 놓아도 당선되는 시절이 있었다. 지역감정이다. 표를 구하는 자들이 시의적절하게 이용하는 망국의 장난은 지금도 최고의 전략이다. 그 놈이 그 놈일진대 ‘우리가 남이유’라면 끝이다. 자존심이란다. 그러다보니 자질은 간데없고 나불대는 입만 살아있으면 된다. 지역잔치에 중앙이 춤을 추는 꼴이다.
이제,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지도자를 원한다. 거창하게 섬김의 리더십 운운할 것도 없다. 지도자는 시민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권위적인 시대는 그랬다. 시민을 우매하게 여기고 시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여겼다. 배만 부르게 만들어 주면 된다고 여겼다. 그 뒤에서는 온갖 인권유린과 추잡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박수를 받는다고 치부했다.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배부를 것이다.
하여 경제다. 때가 되면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들은 말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 만큼 배부름만으로는 안 된다. 복지를 말한다.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는 어찌 보면 말장난일 수도 있다. 굳이 노블레스 오블레주라는 거창한 말을 거론할 것도 없다. 어려운 사람이 먼저다.
시대의 화두인 복지는 사회정의와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복지를 마치 적선하듯, 선심 쓰듯 생각하는 기득권자들의 몰염치는 아직도 콘크리트 벽이다.
국가든 지역사회든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흥망이 좌우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덕적으로 흠집투성이고, 큰 틀의 청사진 하나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지도자를 옛날의 방식으로, 손 한번 잡아 본 정으로 선택한다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시민의 선택이 곧 자신의 잘남을 인정해 준 것으로 알고, 허황된 선전이 절대적으로 먹혀 든 것으로 착각하고, 호통을 최고의 리더십으로 여기는 자를 그동안 우리들의 지도자로 모시지는 안 했는지 반문해 볼 일이다.
진정 부끄러움을 아는 지도자를 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지도자만이 시대의 흐름을 안다. 시민의 아픔을 이해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사고로는 모두가 원하는 따스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시민을 아랫것들로 여기는 지도자가 어찌 시민의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며, 더불어 사는 복지를 논할 수 있겠는가. 시민은 통치의 대상도 적선의 대상도 아니다.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주고 지켜주는 호위병은 더더욱 아니다.
부끄러움을 일깨워줘야 하는 책무는 언론의 몫이다. 권력에 빌붙어 아양이나 떨고 마사지나 해대는 언론이 되지 않게 만들 책임은 시민의 몫이다. 언론이 건방져지고 권력화 되는 것을 막는 것 또한 시민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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