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웅 전임국장
박두웅 전임기자

청년이 주목받고 있다. 정치에서, 언론에서 청년이 이처럼 주목 받았던 적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특히 지난 총선이후 청년은 정치적 화두가 됐다. 기성 정치인들의 정치적 필요에 위한 호출인지, 아니면 이미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진줄 알았던 청년이 부활한 것인지 알길이 없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말이다.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민태원(閔泰瑗)의 수필 청춘예찬에서 1930년대 젊은이들의 피 끓는 정열, 원대한 이상, 건강한 육체를 들어 청춘을 찬미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오늘날 청춘은 듣기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말이 아니며, 청년은 자유로운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존재도 아니다. 오늘날 청춘과 청년은 암울하며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터널이자 거기에 갇힌 존재들에 더 가깝다. 백수, 알바, 비정규직, 실업, 절망, 포기와 같은 말들이 청년을 대변한다. ‘청년이란 과연 무엇인가? 기성세대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논 신조어일까. 아니면 나이 지긋한 노년의 언덕에 서서 젊었던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표현하는 나 때는~!’의 허풍일까.

청년이란 단어의 기원

청춘예찬에서 젊은 시절을 가리킨 청춘이라는 말과 달리 청년은 근대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말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일까. 오늘날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많은 말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 역사가 길지 않다. 근대 이전에는 없던 말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전과는 다른 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말들이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다. 실제 청년이라는 단어는 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가진 대표적 신조어다.

청년이라는 말은 기독교청년회의 소개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young/young men’의 번역어 청년이 처음 사용된 것은 1880년대 일본에서 기독교인인 코자키 히로미치(小崎弘道)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s)기독교청년회로 번역하면서부터다.

이후 한국에서도 청년1900년대 전후 근대 잡지와 신문에 종종 등장하다가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대유행어가 되었다. 당시 근대적 잡지를 만들었던 최남선이 소년청춘으로 잡지의 제목을 삼았던 것도 당시 유행과 무관하지 않다.

1900년대 전후로 근대적 교육 제도가 만들어지고 법제화되면서 근대적 교육을 받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름이 소년또는 청년이었다. 아이가 장가를 가면 상투를 틀고 어른이 되던(어른으로 대접받던) 시절에 청년은 없었다. 아이와 어른뿐이었다.

청년의 시작과 그 변화

청년이 전 사회의 폭발적 유행어가 된 것은, 근대문명과 서구문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근대정신을 체화한 존재에 대한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청년은 새로움을 선취하는 존재이자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으로 불릴 모든 가치를 선점한 혹은 갖춰야 할 존재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조선신분사회의 해체가 선언되었지만, 현실에서는 신분적 위계가 잔존하고 있었다. 개혁 세력인 청년의 등장은 계급과 지역, 성별에 제약되지 않는 하나의 단일한 새로운 집단의 형성을 알리는 선언이었던 셈이니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혁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청년이라는 단어는 단독적으로 쓰이기보다는 오배청년, 아청년동포, 동포청년, 우리청년, 청년자제등 다양한 조어를 통해 사용되었다.

그후 청년은 해방과 전쟁을 겪었고, 1960~70년대 경제개발을 통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1980~1990년대 정치적 민주화를 선취하는 등 사회 변혁을 이끌었다.

이처럼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후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시대정신의 창조자였던 청년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지 않고 심연의 바닷 속으로 가라 앉은 채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IMF라는 국가파산을 경험한 1997년 이후로 청년이 사라졌던 것이다.

IMF는 각자도생, 과열 경쟁과 물질주의의 홍수 속으로 한국사회를 내몰았으며, 적자생존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승자가 되고, 승자독식의 세계가 DNA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헬조선론이나 금수저/흑수저론이 사회를 범람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때를 같이 한다.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지적했듯이 정글의 법칙대로 부의 불평등은 더 심화되고 있다. ‘사라진 청년대신 그 빈자리에는 태어난 곳, 사는 곳, 서 있는 곳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세대가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이들을 잉여세대라 부른다.

정치인들이 불러 낸 청년의 진실은?

최근 정치세계에서 청년이라는 단어를 불러내어 묶고 이름 붙이고자하는 시도가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불량청년, 소년불량, 맑스보이, 레닌걸, 신세대, X세대, N세대, 88만원세대,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라 불리던 잉여세대는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에 청년이란 이름이 등장했다.

나도 너도, 심지어 청년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청년이라는 존재가 심연의 바닷속에서 깨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21세기 불모의 땅이 허용한 잉여적인 존재들에게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사실 역사라는 장기적 안목에서 보자면 특정 시대의 청년들이 특별히 더 청년다웠을 까닭이 따로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이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비 한 방울 없던 대지가 비를 만나 꽃을 피우 듯 청년이라는 꽃이 이 땅에 다시 피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문점은 남는다. ‘청년은 새로움을 선취하는 존재이자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으로 불릴 모든 가치를 선점한 혹은 갖춰야 할 존재이며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기성세대들의 필요에 의해 무대로 호출된 대본 따라 연극하는 배우라면 그는 분명 부활한 청년도 시대정신의 창조자였던 청년도 아니다. 그는 아직도 잉여세대일 뿐이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가 뜨거운 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이다.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 보이는 끝 끝까지 찾아다녀도, 목숨이 있는 때까지 방황하여도, 보이는 것은 거친 모래뿐일 것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 남는 것은 영락(零落)과 부패뿐이다. 낙원을 장식하는 천자만홍(天紫萬紅)이 어디 있으며,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과실이 어디 있으랴?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음으로써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釋迦)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황야에서 방황을 하였으며, 공자(孔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轍環)하였는가? 밥을 위하여서, 옷을 위하여서, 미인을 구하기 위하여서 그리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커다란 이상, 곧 만천하의 대중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밝은 길을 찾아주며, 그들을 행복스럽고 평화스러운 곳으로 인도하겠다는 커다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길지 아니한 목숨을 사는가 시피 살았으며, 그들의 그림자는 천고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현저하여 일월과 같은 예가 되려니와, 그와 같지 못하다 할지라도 창공에 반짝이는 뭇 별과 같이, 산야에서 피어나는 군영(群英)과 같이, 이상은 실로 인간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라 할지니, 인생에 가치를 주는 원질(原質)이 되는 것이다.

이상! 빛나는 귀중한 이상! 그것은 청춘의 누리는 바 특권이다. 그들은 순진한지라 감동하기 쉽고, 그들은 점염(點染)이 적은지라 죄악에 병들지 아니하고, 그들은 앞이 긴지라 착목(着目)하는 곳이 원대하고, 그들은 피가 더운지라 실현에 대한 자신과 용기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은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보라, 청춘을!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는 생의 찬미를 듣는다. 그것은 웅대한 관현악(管絃樂)이며, 미묘한 교향악이다. 뼈끝에 스며들어가는 열락(悅樂)의 소리다. 이것은 피어나기 전인 유소년(幼少年)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오직 우리 청춘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다. 우리는 이 황금시대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 이 황금시대를 붙잡아두기 위하여, 힘차게 노래하며 힘차게 약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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