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영령들 허공에 떠돌고 있어

▲ 서산시 성연면 일람리 621의 2 일대 일명 ‘메지골'은 1950년 7월 서산·태안지역 보도연맹 연루자 수십 명이 적법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좌·우익 3차례의 집단학살...주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겼고, 65년이 흐른 지금도 그 상처와 갈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6·25 전쟁 초기 우리 서산지역 이야기다.

전쟁 시기 서산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은 보도연맹원 희생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그리고 부역혐의희생사건이 상호 고리처럼 연결되어 연이어 3차례 발생했다.

맨 처음 군경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을 집단 살해한 것이 직접적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이어 인민군 점령기에 보복적 차원의 집단살해사건이 있었고, 수복 후에는 상상을 초월한 잔혹행위와 더불어 대규모의 집단살해사건이 발생했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서산·홍성 방면으로 남진하자 서산 경찰은 예산 지역의 경찰과 함께 신창 등지에서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진 서산과 태안 경찰은 7월 12일경 지역의 모든 공공 기관을 소개한 뒤 철수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전쟁 직후부터 군 경찰서나 면 지서에 예비 검속을 해 두었던 보도 연맹원이나 요주의·요시찰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경찰이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등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한 것도 퇴각 직전인 7월 9일부터 12일 사이였다. 메지골 마을 주민 공 모씨는 그날 거의 하루 종일 총소리가 요란했고, 그 당시 어른들이 메지골 산골짜기 초입부터 끝까지 시체들로 가득차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서산경찰은 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연행하거나 불러들여 구금한 후 인민군의 남하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산 성연면 메지골 △당진 한진포구(목캥이) △태안 백화산(사기실재) 등지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당시 태안경찰서에 순경으로 근무했던 이 모 씨는 진실화해위의 조사에서 "충남경찰국의 지시로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 중 일부를 대전형무소로 이송했고, 후퇴하기 2~3일전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을 '즉결처분 하라'는 공문을 충남경찰국으로 받았다"고 진술했다.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대규모 우익 민간인학살

▲ 서산시 양대동 937 일대는 1950년 9월 서산·태안지역 민간인 수십 명이 퇴각하던 인민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무참히 총살돼 매장된 곳으로 추정된다.

서산군의 경우 1950년 7월 18일부터 9월 30일경까지 인민군 3개 연대가 군 경찰서에 주둔하였다. 당시 서산 지역의 지방 좌익들은 인민군과 노동당의 지도하에서 군청과 경찰서 등을 장악한 뒤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인민 공화국 시기, 서산군에도 정치 보위국의 지휘 하에서 군 내무서, 면 분주소, 리 자위대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 북한 정권은 군·면 단위의 노동당과 인민 위원회 조직, 또는 청년 동맹, 농민 동맹, 여성 동맹 등 각종 정치·사회단체를 조직한 뒤 이를 매개로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핵심 내용으로 한 북한식 토지 개혁, 8·15해방을 기념한 궐기 대회 형식의 인민재판, 징병과 전쟁 물자 징발 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1950년 9월 중순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자 서산 지역에 주둔했던 인민군도 인민군 전선 사령부의 후퇴 명령에 따라 1950월 9월 30일경부터 후퇴를 시작했다. 당시 태안 지역에도 미군들이 함포 사격을 하면서 근흥면 지역으로 진입을 시도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퇴각하는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대규모 우익 민간인학살 사건이 소탐산과 양대리에서 벌어졌다. 인민군과 좌익세력은 대한청년단원, 공무원, 경찰공무원과 가족 등을 학살하고 심지어 여자까지 경찰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대상에 포함시켰다.

소원면 부면장 김성용 씨, 전직 경찰이었던 이창영 씨, 의용소방대였던 심형섭 씨 등도 서산내무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양대리에서 총살 혹은 창으로 척살되었다. 심지어 박종혁 씨는 집안이 부유하다는 이유로. 박홍진 씨는 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와중에 집안끼리의 토지문제 등 개인적 원한으로 인해 밀고 되어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진실화해위 기록에 의하면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의 학살은 서산시 177명, 태안군 156명 모두 333명이 희생되었다. 지금도 서산시 수석동 소탐산 자락에는 당시 희생된 300여 명 중 28구가 안치돼 있는 ‘반공호국희생자 합동위령탑’이 있다.

 

우익에 의한 부역혐의자 집단학살

▲ 서산시 갈산동 산 2의 87 일대는 1950년 12월 서산·태안지역 부역혐의 체포자 1천865명중 일부가 집단 희생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서산군이 수복되자 서산 지역의 우익 청년(의용 경찰, 의용 소방대, 대한청년단)들은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 치안대를 조직한 뒤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부역자들을 무단으로 색출하여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역 혐의자에 대한 사사로운 학살은 10월 8일 경찰 진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1950년 10월 초순부터 12월 말경까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해군 등에 의해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2,000여 명 이상의 부역 혐의자들이 좌익이란 죄명을 쓰고 집단 학살되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북한군 점령기에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 및 우익단체 등이 주축이 된 치안대가 자의적으로 처형 대상자를 정하면서 피해 규모가 컸다”고 밝혔다.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한 경찰은 “부역 혐의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감정이 많이 개입됐다”고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진술했다.

특히 우익인사들이 집단학살 당했던 소탐산이 이제는 부역혐의자 집단학살의 장소로 사용됐다. 소탐산 부역혐의자 집단살해사건은 1·4후퇴 직전에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에 의해 발생했다. 사건 당시 소탐산에 거주하고 있는 한○○은 경찰이 부역혐의자들을 트럭으로 이송하는 것을 목격했고, 이후 약 한 시간 동안 총소리를 들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전했다.

당시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 정○○도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급해서 그냥 끌고 갈 수 없으니까 (부역자들을) 소탐산에서 죽였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해미면 홍천리의 전재기 씨는 아버지와 함께 친척의 시신을 수습하러 소탐산에 갔었는데, 수십 구의 시신이 골짜기에 쌓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당시의 참혹함을 전했다.

당시 서산경찰서 ○○지서장 등 다수의 경찰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희생자들은 명확한 처리기준 없이 경찰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대상자로 분류됐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치안대원과의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는 등 부역혐의가 불분명한 민간인의 희생도 매우 많았다”고 밝혔다.

서산지역은 전국 최대 규모의 민간인 희생 지역이다. 아직도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영령들이 허공에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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