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국민들이 생색내지 않고 배려하는 봉사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됐으면...“

서산시자원봉사센터 김학수 이사장
서산시자원봉사센터 김학수 이사장

글을 열며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이미 내 마음은 어린 시절 첩첩산골 인지면 오지마을에서 레슬링을 하는 그때로 돌아갔고, 학교 다니며 좁은 산길을 걷다 산새소리 하나에도 놀라 줄행랑을 쳤던 까까머리 학생으로도 돌아갔다.
다 커서 만난 서울역 무료급식소를 보며 시골에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게 됐다. 더구나 굶다 돌아가시는 사람들 얘기를 들으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렇게 나는 누구보다 뜨거웠던 청춘을 봉사에 몸담았고 이 일은 앞으로도 태어나 가장 잘한 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지난 20일 만난 서산시자원봉사센터 김학수 이사장은 지나온 발자취를 얘기하며 생색내지 않은 봉사, 배려하는 봉사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국민들이 나날이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서산시자원봉사센터는 자원봉사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서산시자원봉사센터는 자원봉사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Q 어린시절 얘기를 해달라.

우리 동네는 12가구 밖에 없는 분지의 안골 서산 인지 오지마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남동생 둘에 여동생 다섯 8남매의 맏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나름 대식구였지만 배를 곯는 일 없이 삼시세끼는 꼭 먹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그때가 참 행복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동네일을 보셨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농사일로 바쁜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네를 돌며 고지서나 석유배급 심부름을 했다. 그때 본 기억으로는 아침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집이 참 많아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어린 마음에도 배를 곯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우리는 동네 큰 마당에 모여 밤늦도록 레슬링을 하며 놀았다. 그 당시 우리의 히어로는 바로 김일 선수였다. 한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공한 프로레슬러 김일은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상대편 머리를 잡고 박치기하는 기술 헤드 벗으로 우리를 환호케 만들었다.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외다리 원폭 박치기를 따라하며 하루를 즐겼다. 이 때문에 마을 동네 아이들은 나름 저마다 박치기왕꼬마 김일이 되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농촌봉사를 하며
생강을 캐는 김학수 이사장(왼쪽 첫번째)

Q 부모님의 교육관은 어땠나?

개구쟁이였지만 서당 훈장이셨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가정교육은 엄격했다. 더구나 어른들은 줄줄이 동생들이었기에 맏이가 바로 서야 집안이 바로 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가정에서부터 뿌리가 되어 부모가 본이 돼야 아이들의 인성이 형성된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가정 안에서의 교화에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우리 집안의 예절 교육 담당은 언제나 할머니였다. 우리 가족은 절대 흐트러진 모습으로는 밖으로 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또한 아버지는 집안을 바로 세우게 하기 위해 장남인 나를 공주사범대학교에 입학하여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항심도 있었지만, 하루빨리 시골을 벗어나 대도시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행복드림 자원봉사단 정기총회 후 단체사진

Q 학창 시절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은?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집은 두메산골 분지였다. 그곳에서 중학교랍시고 서산시 인지면 소재지로 나오니 무슨 별천지 같았다.

4km를 걸어 걸어 나오다 보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려 어린 나이에도 지칠 지경이었다. 산을 넘고 소로를 걸어야 했던 당시를 떠올려보면 늘 무서웠다는 기억이 많다.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워 다리가 후들거릴 때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같아 100m 달리기선수도 돼야 했다.

그때는 특히 무장 공비가 무서웠고, 귀신도 그렇게 무서웠다. 간이 작아서 혼자는 도저히 무서워 다니지 못해 늘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녔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워낙 시골이라 절반 이상은 내려 다시 산길을 걸어 들어가야 우리 집이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버스요금이 없을 때도 많아 걷는 건 이골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때론 어르신들이 정말 무거운 물건을 사서 이고, 지고, 들고 오시는 것을 발견할 때도 마음이 조급했다.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할머니 말씀이 자꾸 떠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짐을 받아 들고 씩씩하게 동네어귀로 들어서곤 했다. 사실 책가방도 무거웠을 텐데 어른들의 칭찬 한마디가 나는 더 좋았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는 마술이 칭찬 속에 숨겨져 있단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 나는 나보다 2년 선배들과 놀았다. 이유가 있었다. 여느 친구들보다 덩치가 더 큰 편인 나는 날마다 선배들이 산으로 끌고 가서 구타를 하며 나쁜 짓을 가르치려고 했다. 나는 그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동기들과는 그다지 친분을 쌓지 못했다. 아마도 할머니의 가르침이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김장봉사를 하고 있는 김학수 이사장
김장봉사를 하고 있는 김학수 이사장

Q 살아오면서 가장 슬펐던 일이나 기뻤던 일이 있다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가장 슬펐던 일이다. 당시 52세였던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가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은 상상을 할수 없는 일이었다. 아득함 가운데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긴 침묵 속에서 월요일을 보냈고 화요일 그리고 일요일을 보내기를 여러 날이 이어졌다. 집안일과 동네일을 앞장서 해주신 우리 아버지. 너무 고되고 힘들게 사시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시고 가신 게 너무 슬펐다.

슬퍼하는 가족들을 보니 마음이 찢어졌고, 아버지를 생각하니 너무 불쌍했다. 많은 조문객이 위로의 말을 전하고 갔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방법도 몰랐다. 심지어 내 마음조차 챙기는 방법을 몰랐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다.

그 가운데서 감사한 일도 있었다. 어머님께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 8남매 모두 우애 있게 잘 지낸다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특히 손자가 삼성SDI에 입사해서 교육 중에 있다.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 기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남겨진 우리 모습을 보신다면 기쁘하실 것 같다.

희망쌀나눔 봉사회원들과 함께 송년회에서

Q 현재 서산시자원봉사센터에서 이사장직을 역임하고 계시다. 봉사를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아시다시피 서울역, 용산역, 영등포역 근처에 가보면 노숙자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봉사단체에서는 날마다 그분들께 점심을 제공한다. 그런데 막상 시골 고향에 내려오니 젊은 시절 그렇게 고생하시던 우리 부모님들은 정작 누구 하나 챙겨 주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식도, 이웃도 없이 쓸쓸히 굶고 계신다는 이야기도 내 귀에 들려왔다.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언젠가 어떤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큰 울림이 있어 한 번씩 되뇐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했던 말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외로운 사람을 찾아주고, 억눌린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해야 할 일이다.’

자원봉사자 대회에서 봉사자에게 뱃지를 달아주고 있다.

Q 봉사를 하면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은?

쌀은 남아도는데 왜 굶는 어르신들이 계시고, 심지어 굶어서 돌아가시는 분은 왜 나올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만든 단체가 희망쌀나눔봉사회였다. 처음에는 참 어려웠다. 쌀 열 짝을 가지고 시작했던 봉사회. 왜 그리도 쌀 없는 집이 많은지. 정말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열정적으로 돌아다니며 협찬을 받았다. 그런데도 15개 읍동에 매월 다섯 가구씩 쌀을 나눠 주는 게 너무 버거웠다. 도저히 힘들어 결국 세 가구로 줄이기도 했다. 줄일 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그 와중에 어떤 회원은 자기 애인 집에 쌀을 가져다주는 사례를 발견했다. 또 식당에 갖다주는 사람 등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나와 회원들의 힘을 빼게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시대에 배고파 죽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낌새를 발견하곤 한 달 동안 직접 배달을 가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승용차에 10kg짜리 쌀을 가득 싣고 다니다 보니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났다. 그럼에도 보람이 있으니 견딜 수 있었던 그 시절.

이 밖에도 모금을 하기 위해 호수공원에서 희망축제행사를 열었다. 정말 대 성황이었다. 자그마치 1억여 원이라는 기금이 모였다. 사실 그전에는 식당이나 웨딩홀 같은 곳을 빌려 행사를 하다 보니 임대료 주고 나면 헛고생만 남았다. 이런 기획을 할 수 있도록 힌트를 준 경기도 분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2021년 자원봉사자대회에서 윤주문 전)서산시자원봉사센터장과 함께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현재 우리 서산시에 등록된 봉사자 수는 6만여 명이고, 봉사단체만도 350개에 이르고 있다. 자고로 서산시 하면 바로 자원봉사의 메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봉사자 중에는 자신의 욕심과 과시욕 때문에 봉사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이런 분들은 제발 참아 줬으면 좋겠다.

또 선량한 봉사자에게 피해를 주는 예도 있다. 일부 몰지각한 봉사자 중에는 지자체에 들어가 무엇을 해 달라는 등 어깃장을 놓는 사람, 심지어 협박까지 한다는 사례도 접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디 봉사하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봉사를 했으면 한다. 어떤 속셈이 있거나 다른 욕심이 있는 봉사자는 이제 더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로부터 봉사란 모름지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배워 왔다. 나는 앞으로도 내 몸이 허락하는 한 봉사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 속에는 우리 서산시민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걱정 없는 도시, 즐겁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바라는 염원을 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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