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벌판을 걸을 때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이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고 김정규 선생의 증손자인 대산읍 화곡리 김증하 씨
고 김정규 선생의 증손자인 대산읍 화곡리 김증하 씨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대답할 것이다. - 백범일지 중에서


겨우내 얼었던 얼음도 녹는다는 우수도 지났다. 남녘에 봄 소식이 왔는데 잊혀진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찾아 나선 길, 영하 9도를 넘나드는 동장군의 기세가 매섭다.

대산읍 화곡2리 경로당을 끼고 들어 선 농로를 따라 흙빛이 참 좋다. 마을 서편 생수골 야산이 고려시대 청자 가마터였다고 한다. 어릴 적 청자 조각들로 사금파리 놀이를 많이 했다는 마을 할머니 말이 살아 있는 역사다.

경로당에 계신 마을 어르신들께 김증하(1945년 생) 어르신 댁을 물었다. 경로당 총무 일을 헌신적으로 잘 하시는 분이라며 몸소 나서 자세히 길을 알려주신다.

첫 대면부터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몸가짐을 삼가시는 예절이 몸에 밴 어르신이다. “후에 나이 어린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터인데 어찌 조심스럽지 않느냐는 조부의 가르침 덕이라고 했다.

고 김정규 선생이 백범 김구, 이시영, 이승만 박사에게 받았던 증표
고 김정규 선생이 백범 김구, 이시영, 이승만 박사에게 받았던 증표

조부인 김정규 선생은 고종 11(1874) 봄에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親政)하면서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187458일 당시 대산면 화곡리에서 탄생했다. 1876829일생인 백범 김구 선생보다 2살 연상이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중국에서 귀국한 다음 해인 19464월 공주에서 열린 환영회 때였습니다.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당시 70세셨던 조부께서는 김구 선생을 만나러 공주에 가셨다가 5일 만에 돌아오셨는데, 어찌나 기뻐하셨던지 마을 어르신들께 당시 상황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 115명은 해방을 맞은 해인 19451123일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환국했다. 하지만 당시 미군정은 미국에 있던 이승만과 달리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 자격으로 귀국케 하는 등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크게 우대하였던 것이다.

고 김정규 선생이 백범 김구, 이시영, 이승만 박사에게 받았던 증표
고 김정규 선생이 백범 김구, 이시영, 이승만 박사에게 받았던 증표

194512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국민들의 대규모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에 대해서도 미군정은 냉담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정국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으며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정 요인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섰고, 미군정과 친일세력으로부터 사사건건 견제를 받았다.

어느덧 해가 바뀌면서 고향이 황해도 해주였던 김구 선생은 38이남 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인천에 이어 19464월 하순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이 소식을 접한 김정규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공주로 향했다. 공주에서는 충청남북도 열 한 개 군에서 10여 만 동포가 모여 김구 선생 환영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환영회에서 김정규 선생은 서산군 대표로 김구 선생의 손을 맞잡았고, 김구 선생은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며 동지로서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 날까지 일행과 함께 마곡사 일정을 함께 했다.

김정규 선생은 한학을 공부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겉으로는 대산면정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33년도부터 독립군 및 광복군의 자금책을 맡아 대산면책으로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감시가 심할 적엔 선산 묘지석을 세운다는 핑계로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고, 비석은 시멘트로 만들어 위장하기도 하였다. 그 시멘트 비석은 한 때 분실되었다가 증손 김증하 선생이 찾아 선산에 세웠다. 당시 보령 웅천 오석으로 만든 비석 가격이 벼 이석으로 1년 머슴 고용 비용이 벼 1석 반인 것에 비하면 아주 큰 돈이었다고 한다.

당시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거주하던 김정규 선생 매제 또한 광복군(1942~1944) 단원과 자금책으로 활동하였다. 매제는 대산면 대죽리 숙호지 최00 씨 댁에 들렸다가 지인의 밀고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산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사하였다는 소문만 전해질 뿐 그 생사를 알 수 없다. 김정규 선생은 당시 일경의 움직임을 미리 눈치채고 매제에게 피하라는 소식을 알리려 달려갔지만 이미 포승줄로 묶인 뒤였다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김정규 선생은 유학자로서 일제의 단발령에 반대하고,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달하면서 일제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쌀과 잡곡을 수탈하고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절이나 교회의 종, 가정에서 쓰는 놋그릇과 숟가락 등 쇠붙이를 빼앗아가자 이에 항거 반대 운동을 하다가 구류 처분을 받았고, 소나무 송진 채취 반대에 나서면서 또다시 구속되는 등 일경의 감시대상자가 되면서 위장 활동에 도움이 컸던 대산면정 자문위원회 위원직도 내놓아야만 했다.

한 때 분실되었다가 증손 김증하 선생이 찾아 선산에 세운 독립자금 마련 위장용 시멘트 비석
한 때 분실되었다가 증손 김증하 선생이 찾아 선산에 세운 독립자금 마련 위장용 시멘트 비석

한편, 김정규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 한쪽을 절음발이로 살다 백범 김구 선생과의 공주 만남을 끝으로 그다음 해인 1947년 세상을 떠났고, 2년 후인 1949626, 백범 김구 선생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하는 민족사 비극의 사건이 벌어졌다.

백범 김구 선생은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라고 말했다.

겨울은 가고 온갖 생명이 움트는 봄이 오고 있다. 우리에게 그 생명의 길, 참 독립의 길을 가르쳐 주는 이들이 있다.

눈 오는 벌판을 걸을 때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이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이 글은 백범 김구 선생이 자주 인용하던 사명대사의 글이며, 독립운동사의 숨겨진 비밀요원 김정규 선생이 걸어간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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