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인협회, 서산시인 윤곤강 문학 기행

기고

잠들어 계신 묘지 앞에서
잠들어 계신 묘지 앞에서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1925년 김기진, 이기영, 박영희 등이 조직한 프롤레타리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이다. 윤곤강시인은 동경 센슈대학의 유학과 카프에 가담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무력과 허탈을 고백하고, 암울한 현실에 저항하는 시를 주로 썼다.

시인은 1911년 충청남도 서산출생으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까지 한학을 배우고, 보성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동경 센슈대학을 졸업한다. 식민지배하의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다하려 했을까, 민족단체 중의 하나인 카프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4년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투옥된다.

이듬해 카프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그는 동물을 소재로 식민지화로 길러지는 시대성을 비판하고, 사회 현실에 대해 저항한다. 해방 이후 너무도 혼란스러운 해방 후의 진통을 견디다 못해 일어난 6.25를 겪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그는 19501월 타계한다.

윤곤강 시인 무덤 앞에서
윤곤강 시인 무덤 앞에서

윤곤강 시인의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갈산리의 작은 야산에 잠들어 있다.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시인을 찾아가는 안내 표지판이 친절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자 겨울 숲이 풍겨내는 나무와 흙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아늑한 지형과 평화로운 마을, 아직도 황토집이 살아 있고, 길을 가다가 이웃집의 문을 두드리면 금 새 문을 열어 줄 것 같은 정겨운 마을이다.

마을 뒤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작은 언덕을 오르면 두 개의 무덤이 나타난다. 편안하고 조화로운 지형의 품 안에 묘소가 있다. 윤곤강시인의 봉분 위로 아주 오래된 묘 두 기가 있는데 평창군수와 참판을 지낸 윤유길과 그의 부인의 묘라는 지석이 있다. 그런데 묘가 세워진 연도가 260여 년 전이다. 윤곤강시인은 선대 할아버지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에서 후세를 보내고 있었다.

무덤 왼편에는 이 지역 문학단체인 나루 문학회가 기증한 시인의 영원을 기리는 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시인 윤곤강 잠들다와 함께 아래의 시구가 적혀있다.


다섯 손꾸락 사뿐 감아 쥐고/ 살포시 혀를 대어 한 가락 불면/ 은쟁반에 구슬 구을리는 소리

슬피 울어 예는 여울물 소리/ 왕대숲에 금바람 이는 소리


윤곤강 시 피리의 일부이다. 한가로운 겨울 윤곤강의 피리 소리가 저기 내려다보이는 왕 대숲까지 금 바람을 일으켜내고 있는 듯하다. 언덕 위 그의 곁에 서서 그의 시 하나를 펼쳐 본다.


언덕

 

언덕은 늙은 어머니의 등허리를 닮았다.

 

마음이 외로워 언덕에 서면

가슴을 치는 슬픈 소리가 들린다

언덕에선 넓은 들이 보이고

 

먹 구렝이처럼 달아나는 기차는

나의 시름을 싣고 가버리는 것이다

 

언덕엔 푸른 풀 한 포기도 없다

 

들을 보면서 나는 날마다 날마다

다가오는 봄의 화상을 찾고 있다

아 아, 고대 죽어도 나는 슬프지 않겠노라.


그가 있는 언덕에서 기차는 보이지 않겠지만, 긴 시간 동안 봄의 화상을 찾고야 말았을 터이니 마지막 시구처럼 슬프지 않게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를 뒤로하고 그의 시비가 있는 서산시 문화회관으로 향한다.

윤곤강 시인의 생가터, 시비를 찾아 서산으로 달렸다.

서산시 시민문화회관 우측 가장 빛나는 자리에 그의 흔적이 있다. 시인의 생애와 그의 대표작 나비가 새겨 있는 두 개의 비석이 서로 볼을 기대고 다정하게 서 있다. 윤곤강 시인은 서산의 자랑스러운 대표 인물로 모시는 듯하다.

시비 뒤편으로는 아담한 조각공원이 위치하여 시비를 찾는 사람들이 더욱 많을 것 같다. 외진 곳에, 쓸쓸히,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시비들이 대부분이다. 유명한 시인의 시일지라도 지역주민 가까이 있어도 지나치기 쉬운 곳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서산에서는 그 대우가 달랐다.

시인과 나비를 간직한 시비는 서산 문화의 상징처럼 서 있었고, 그토록 이곳 시민들에게 이미 각인 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비 앞에 주차장 표시가 강하고 주차된 것을 넘어 주차한 차주에게 전화로 차를 이동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등 우발적 사건이 있었다. 사진을 찍는데 애로가 있었다는 것이다.

서산의 김일형 시인과 연락이 닿은 박만진 시인이 시비를 세우게 된 대략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었다. 안정을 찾아가며 나는 이 시비 앞에 서 있는 동안 작은 시인이 되어 있었다. 시인과 시와 문화를 다정하게 대하는 서산사람들의 따뜻한 마음, 문화 의식이 높은 서산사람들을 담아보았다.


 

나비

 

비바람 험상궂게 거쳐 간 추녀 밑

날개 찢어진 늙은 노랑나비가

맨드라미 대가리를 물고 가슴을 앓는다

 

찢긴 나래에 맥이 풀려

그리운 꽃밭을 찾아갈 수 없는 슬픔에

물고 있는 맨드라미조차 소태맛이다

 

자랑스러울 손 화려한 춤 재주도

한 옛날의 꿈 조각처럼 흐리어

늙은 무녀(舞女)처럼 나비는 한숨 짓는다


이번 문학기행은 제1<윤동주 신인상> 당선자인 김일형 시인과 함께했다. 김일형 시인은 서산 출신으로 서산고등학교 교사이다. 그의 시는 기존의 시인들과 달리 내면에서 끌어올린 시적 사유, 산울림 같은 그만의 정서를 선보이며 등용문에 올랐다. 김일형 시인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따수워(충청도 서산어?) 진다. 마치 윤곤강 시인, 윤동주 시처럼 따뜻함이 닮았다.

20213월엔 윤곤강 문학기념사업회 창립총회도 개최되었다. 김일형 시인은 기념사업회의 기획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 서울시인 협회는 수천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인 협회의 명예회장이신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장님 또한 윤곤강 문학기념사업회 고문으로 활약하고 계신다니 자긍심이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윤곤강 시인의 문학 정신이 서산 시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는데 주춧돌이 되고, 꿈이 되기를 빈다.

여행의 종착지는 태안의 나오리 생태예술원이었다. 윤곤강 시인이 만들어준 인연들, 그리울 것들을 한가득 간직하고 서울로 향하는 초대형 관광버스에 오른다. 언제나 서울로 돌아가는 창밖으로는 두고 온 그리움과 남겨진 그리움 두 개의 그리움들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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