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파도성...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했던 흔적만 남아

고파도항에서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 기념촬영
고파도항에서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 기념촬영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은 지난 1031일 가로림만 20215차 탐사 일정으로 가로림만 내에 가장 큰 섬인 고파도로 향했다.

가로림만해양정원 유치 염원과 함께 해양쓰레기 정화활동을 겸한 이번 5차 탐사에는 회원 60여 명이 함께 했다. 이번 탐사는 아라메길 4-1구간(솔감저수지에서~호리항), 황금산, 도성리 칠지도 구간, 웅도 구간에 이은 다섯 번 째 탐사로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 가로림만 스토리텔링을 입히다일환으로 진행됐다. - 편집부

고파도항 팔봉호
고파도항 팔봉호
해양쓰레기 정화활동에 나선 가로림만탐사단원들
해양쓰레기 정화활동에 나선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원들
수거한 해양쓰레기 모습
수거한 해양쓰레기 모습

# 고파도, 옛 이름은 파지도(波知島)

가로림만은 항아리 모양이다. 그 항아리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구도항이다.

구도항에는 70년대까지만 해도 대산읍 오지리 벌말포구를 거쳐 인천까지 다니던 기선이 있었다. 기선은 구도항에 도착하면 다음 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고 출항은 대략 5일 간격으로 이루어져 월 6회 정도 운행했다.

여객선 정원은 100여 명에 달했고, 뱃삯은 비교적 저렴하여 주로 장사꾼들이 이용했다. 마을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주로 소금, 곡물, 나무를 인천에 가져다 팔았다고 한다.

고파도리 마을 전경
고파도리 마을 전경

1950년대까지는 칠복호’, ‘명동호등 목선이 운행됐다. 1960년대 들어서야 충남호’, ‘은하호등 근대식 여객선이 취항했다.

현재는 인천으로 가는 배는 사라졌고, 가로림만에서 가장 큰 고파도만 하루 3회 운항한다. 고파도는 조선시대 잠시나마 수군이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옛 이름은 파지도(波知島).

서해안의 전라·충청도 지역은 곡창(穀倉)지대와 조운선(漕運船)의 통로라는 점 때문에 왜구들의 약탈 대상지역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파지도영(波知島營)은 군 북쪽 35리에 있다. 수군 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병자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337척에 높이는 11척이며, 안에 한 우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원들

고파도라는 이름은 바자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바자라는 것은 대, 갈대, 수수깡 등으로 엮은 발을 일컫는다. ‘이라 함은 그물을 이용한 양식 이전에 갈대 또는 왕골, 시누대나 큰 대나무를 깎아 그물 대용으로 엮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에서 바자가 유래되었다.

이처럼 고파도는 원래 바자섬으로 불리다가 바지라는 방언으로 바뀌어 바지섬으로 불리었고, 이를 한자로 파지도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이를 줄여 파도라고도 불렀다.

구도항에서 팔봉홍 승선하는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
구도항에서 팔봉홍 승선하는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

조선시대에는 서산군 문현면 고파도리와 태안군 북일도면 고파도리로 나뉘어 있다.

나뉘어있던 두 동리가 1895(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하나로 합쳐져 태안군 북일면 고파도리로 되었다. 199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태안군에서 서산군 팔봉면 고파도리가 되면서 현재까지 서산시 소속이다.

고파도는 굴의 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송 수단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절, 고파도 주민들은 서산 장으로 굴을 팔러 가야 할 때면 직접 노를 저어 팔봉면 흑석리까지 갔다. 가로림만의 바다는 겉보기에는 호수처럼 잔잔하지만 사리 때가 되면 물살이 무척 빨라진다.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팔이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흑석리에 도착해서는 굴 지게를 지고 몇 개의 산을 넘어야 서산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섬 사람들의 수고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이야 교통이 괜찮은 편이지만 옛날에는 굴을 따서 팔봉면 흑석리까지 목선을 타고 가야 했죠. 조류가 심할 때 목숨을 오직 하늘에 저당 잡혀야 했죠. 배에서 내리면 다시 지게에 굴을 짊어지고 몇 개의 산을 넘어야 서산 오일장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고파도 굴 맛만은 알아줘 벌이가 늘 괜찮았어요.” 마을 촌로의 이야기다.

해양쓰레기 정화활동에 나선 가로림만탐사단원들
해양쓰레기 정화활동에 나선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원들

# 구도 포구 여인들의 한이 서린 스문여

구도항에서 선착장을 따라 연두곶으로 걷다보면 갯벌 위로 뾰족한 거친 바위군이 보인다. 밀물 때면 사라졌다 썰물 때만 그 모습을 보인다.

동네 사람들은 그 뾰족한 바위가 스무개라며 그 이름으로 불린 사연을 전해준다.

아주 먼 옛날이었다. 동네 아낙들은 가로림만 안에 있는 돌섬 등에서 해산물을 채취해 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식량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날도 스무 명의 아낙들이 나룻배에 올랐다.

아낙들은 날도 화창하고 물 때도 길어 대바구니 가득 해산물을 담아 올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아낙들을 돌섬에 내려 놓은 나룻배 사공은 날씨도 화창하여 인근 고파도에 다녀올 냥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술 한잔하자던 고파도 스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기가 오른 뱃사공은 돌섬에 내려 놓은 아낙들을 까맣게 잊고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몇 시진이 지났을까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폭풍을 일며 거센 파도가 섬을 삼킬 듯 넘실거렸다. 쏟아지는 폭우에 정신이 번뜩 든 뱃사공은 부리나케 노를 저어 돌섬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파도가 삼켜버린 돌섬엔 한 명의 아낙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마을 아낙 스무 명이 소중한 생명을 잃은 것이다. 그날 이후로 바다에 이상한 일이 벌러졌다. 왠일인지 돌섬이 갯벌에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낙들의 죽은 원혼들이 돌섬을 없애, 다시는 여인들의 죽음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바닷 날씨가 흐려지니 문득 스문녀 바위섬에 얽힌 바닷가 여인들의 한 많은 애환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고파도 북측 백사장에서 가로림만탐사단 기념촬영
고파도 북측 백사장에서 서산시대가로림만탐사단 기념촬영

# 고파도 하얀 백사장에 붉은 해당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고파도에는 해당화의 찬란했던 얘기가 옛 이야기가 되었다. 분별없는 손길들이 너 나 할 것없이 해변을 들쑤셔 뿌리째 캐 실어날랐으니 울창하리만큼 무성하던 붉은 꽃송이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잡초군락만이 자리 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내노라 하는 솜씨의 태공들이 몰려들 정도로 다양한 어종이 풍부하던 바다였지만 어디나 그렇듯 점차로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어획량은 상당수 주민들이 운영하던 낚싯배를 포기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

그래도 고파도의 인심은 여전히 후했고 섬 풍경 또 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통도 불편했던 그 옛날 섬 사람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오랜 세월 우리네 바닷가 삶은 척박했다. 선박제조, 조업기술이 발달한 현대와는 사뭇 달랐다. 거기에다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었던 조선시대 어량(漁梁)이나 어전(漁箭)은 대지주 소유였기 때문에 정작 고기를 잡은 어부는 살점 하나 얻어먹지 못하는 수탈도 만연했다.

어민을 이른바 뱃놈’, ‘해변 놈’, ‘갯놈등으로 비하하는 호칭들이 말하듯이 어업은 농업에 비해 천시했던 공업과 상업의 뒷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

한여현의 호산록에 따르면 서산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은 조정에 진상되고 관에 납부되는 것 외에도 관리에게 바쳐야 하는 뇌물도 성행했다. 이를 인정해산(人情海産)이라 하였는데, 백성들은 농사뿐만 아니라 해물 채취에도 동원됐다. 특히 해산물은 겨울 채취가 많아 한겨울 상납용 해산물 채취를 위해 고역을 치러야 했고, 농번기에도 동원되는 등 백성들의 불만이 컸다.

호산록에는 가난한 백성이 얇은 홑옷을 입고 맨발로 언 갯벌에 들어가 낙지와 석화를 잡고, 그래도 뇌물용 해산물이 부족하면 자사들이 장무관과 관원에 고해 억울하고 참혹한 형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금을 구워 생계를 이어가는 염한들의 고통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척박한 환경과 가난, 그리고 수탈은 일상이었다.

서산지역 바닷가 사람들에겐 게국지라는 전통음식이 토속음식으로 전해 온다. 제대로 자라진 못한 무녀리 배추와 채소를 능쟁이를 갈아 함께 담가 먹다 남은 간장 국물로 끓이는 게국지는 척박한 삶의 대명사였다. 게국지는 가로림만 사람들에게도 짭짜롭기도, 잊혀질 수 없는 맛으로도 남았다.

그렇다고 그들은 바다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랬고,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그랬다. 이처럼 고파도를 비롯한 가로림만은 그 척박하고도 먼 여정의 흔적만큼 곳곳에 자취를 남겨 놓았다.

수거한 쓰레기를 들고 승선하는 가로림만탐사단원들
수거한 쓰레기를 들고 승선하는 가로림만탐사단원들

# 고파도 둘레길 조성, 마을 주민들의 최대 현안

가로림만 해양정원 예타 통과 최종 결정 여부가 막바지에 다달은 요즘 고파도 주민들은 아쉬움이 많다. 우선 고파도 갯벌생태계 복원사업이 사업대상지 사유지 부분 토지매입이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고파도 갯벌생태계복원사업을 둘러싸고 소유권을 지키려는 개인들과 이를 강제 수용하려는 정부·지자체가 행정소송이 진행되면서 1심에 이어 최근 2심에서도 서울고법은 국토부의 처분은 부당하다며 토지 소유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산시(해양수산과)가 지난 20181월 기본계획수립 용역에 착수해 20185월 해양수산부(해양생태과)로부터 기본계획승인을 받았고, 실시계획을 수립해 해양수산부의 전문가 현장 자문위원회를 거쳐 지난 2019326일 최종 승인을 받았다.

특히, 생산력 있는 갯벌복원을 목적으로 사업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자문위원단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해수소통 구간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실시계획 승인을 받았다.

고파도항에 도착한 팔봉호
고파도항에 도착한 팔봉호

서산시는 이번 해양수산부 실시계획승인을 통해 2019년 사업대상지 토지매입을 진행하고 2020년에는 본공정에 착수하여 2022년까지 과거 폐염전으로 방치되었던 지역을 대상으로 93,000면적의 갯벌을 복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인수 고파도 이장은 공사 현장을 안내하며 사유지 토지매입 건으로 사업추진에 애로가 많다. 공사가 완료되면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생기게 되면서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 이장은 우리 주민들은 가로림만해양정원 예타통과를 염원한다. 이와 함께 고파도 해안을 일주하는 둘레길 조성도 함께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주 둘레길이 생긴다면 아름다운 풍광을 갖춘 고파도로 많은 관광객의 유입이 기대된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은 학생수가 1명 밖에 없는 고파도 분교도 폐교 위기를 벗어나 다시 학생 수가 늘지 않겠는가. 둘레길은 고파도 마을 주민들의 첫 번째 희망사안이라고 힘을 보태 달라고 당부했다.

젊은 시절, 고파도 하얀 백사장에 붉게 피었던 해당화 군락이 다시 복원되기를 희망하는 이인수 고파도 이장. 그에게 고파도는 애증의 땅이며, 어머니 같은 소중한 보금자리다.

이 취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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