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화가나도 웃어야 되는게 피에로의 삶...그걸 숨기기 위해 분장하는 거 아니겠어요."

정흥모 피에로 아저씨
정흥모 피에로 아저씨

#프롤로그

깊어가는 가을, 여름내 해이해졌던 마음의 거리도 조금은 차분해지는 듯 느긋하다. 사람들은 이맘때쯤이면 지나온 한해를 뒤돌아보며 자신의 발자취를 추억해본다. 멈춘 듯 흐르는 가을에는 유독 그런 일이 잦다.

지난달 30, 피에로 분장 대신 민얼굴에 모자를 푹 눌러 쓴 피에로 아저씨 정흥모 씨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늘 피에로 얼굴만 보다가 민얼굴을 보게 되니 딴사람 같다. 어릴 적 얘기를 해달라.

서산 갈산동에서 목수 일을 하시는 아버지와 가사를 하시는 어머니 사이에 21녀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버스도 오지 않는 오지의 우리 집은 앞뒤 모두가 산밖에 보이지 않았죠. 딱 한 집밖에 없었어요. 당연히 놀 친구도 없었고요.

부춘초로 등교할 때는 일 나가시는 아버지가 오토바이로 태워다 줬죠. 하지만 하교 때는 1시간이 넘는 거리를 혼자서 걸어 다녔어요. 올챙이도 잡고, 버들피리도 꺾어서 불고, 눈이 오면 혼자서 눈썰매도 타고 그렇게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노름에 빠지면서 논 50마지기와 키우던 40여 마리의 소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어느날 시내로 이사 나오게 됐죠. 저는 다시 서산초와 서림초를 다니게 됐고요. 너무 자주 전학 다니는 바람에 아쉽게도 초등학교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저는 산골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하늘을 날 듯이 기뻤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날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습니다. 부춘중 2학년 때 우리 집이 노름으로 완전히 날아가 버렸거든요. 그때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서산 서남초 저학년 운동회날
서산 서남초 저학년 운동회날

Q 갓 입학한 중학교 2학년생이 생활전선에 뛰어들다니. 어떤 일을 했나?

거창한 건 아닙니다. 새벽 4시부터 이른 아침 6시까지 자전거를 타고 왼쪽에는 신문 바구니, 오른쪽에는 우유 바구니를 달고 배달을 시작했어요. 그것도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요. 잠이 쏟아지는 새벽에 일어나는 게 가장 큰 곤욕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월급은 용돈으로 쓰기도 하고, 수업료나 학교 준비물을 사기도 했어요. 그때까지도 들키지 않고 잘했는데 그만 중학교 3학년 겨울, 몸을 다치는 바람에 일하러 나가지 않은 아버지가 새벽에 제가 나가는 소리를 듣곤 수상히 여겨 제 뒤를 밟았던 거죠.

신문사에서 신문을 갖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제 앞을 딱 가로막으며 바구니 안의 신문을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치시는 거예요. 저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왔고요. “아무리 집에 돈이 없어도 어린 내 자식이 배달하는 것은 이해 못 한다며 엄청나게 야단을 치셨죠.

어머니는 옆에서 울기만 하셨고요. 그때 저는 혼나서 마음이 아픈 것 보다 들켜서 배달을 못 할까 봐 그게 더 걱정돼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아요.

Q 혼나면서도 계속 배달을 했나? 학교 가서 많이 피곤했을 텐데.

피곤해도 집에 손 벌리는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겠는데 어쩌겠어요.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배달 알바를 한시도 빠지지 않고 계속 했습니다.

그리고 논산에 있는 연무대기계공고에 입학했지요. 제 성적으로는 도저히 들어가지 못하는 학교를 봉사점수 하나로 운 좋게 들어갔어요. 사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소방서와 경찰서를 돌면서 청소 봉사를 했답니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 봐야 적막강산이잖아요. 할 일이 없어서 봉사했다면 다들 웃어요(웃음).

당시만 해도 학기당 20시간이 봉사 시간이었는데 저는 늘 60시간 이상을 채웠죠. 그게 고교입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처음에는 주말마다 집으로 왔는데 버스비가 장난이 아닌 거예요. 돈을 아끼기 위해 주말이면 서산행 대신 농촌에 돈 벌러 다녔습니다. 당시 기숙사는 시골이 집인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마음 맞는 애들끼리 조를 짜 봄에는 모내기를, 여름에는 수박, 가을에는 토마토와 배밭 등을 다녔어요.

나중에는 농촌에서 뜬모 한다고 기숙사로 전화를 걸어 인기가 높았어요. 주말 알바를 하면서 꽤 돈을 벌었습니다.

충북 음성 대소시장  전통시장살리기 행사 모습
충북 음성 대소시장 전통시장살리기 행사 모습

Q 고등학생이 농촌에서 알바를 하다니. 너무 재밌다. 그럼 서울은 언제 올라갔나?

3 취업시즌이 되면서 학생 중 제일 빨리 경기도 반월공단으로 취업을 했어요. 그 역시 농촌봉사 점수가 한몫한 겁니다. 그런데 일이 얼마나 힘든지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 취업을 나가면 무조건 3개월은 버텨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어요.

3개월은 정말 이를 악물고 다녔습니다. 채우지 못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거든요. 학교는 가기 싫고. 어떡해요. 3개월을 꽉 채우고 나서야 저는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됐습니다.

Q 어쨌든 몸은 자유였지만 여전히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당시 하고 싶은 일은 뭐였나?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었어요. 일명 하루살이 인생인 스페어(SPARE) 알바가 좋았습니다. 제가 주로 했던 일은 식당 아르바이트생이 쉬는 날이면 대신 들어가서 그 일을 때우는 역할이었죠. 불판도 닦아 보고, 오토바이로 배달도 하고, 중국집 주방장도 해봤네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어깨너머로 눈여겨본 걸 수첩에 깨알처럼 다 적었던 것이 진가를 발휘하게 된 거지요. 그곳에서 한 4개월 정도 일 하면서 자그마치 하루에 150만 원까지 팔아봤어요. 브레이크 타임도 없던 그 시절, 불 앞에서 종일 서 있으려니 얼마나 힘든지 죽을 지경이었죠.

더구나 살던 집 환경이 참 열악했어요. 바퀴벌레와 곰팡내 때문에 두통이 끊이질 않았죠.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서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가 고등학교 막바지 가을이었죠.

서산으로 내려오면서 제일 먼저 운전면허증을 따 다방 스페어 알바를 다녔어요.

TVN 드라마 크리미널마인드 출연 모습
TVN 드라마 크리미널마인드 출연 모습

Q 놀랍다. 고등학교 졸업 전인데 그런 일을 하다니.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다.

그럼요 아주 많았죠. 그보다는 그 일이 제2의 직업을 양산하게 된 셈이에요. 당시만 해도 서산에는 한 80개 가량의 다방이 있었어요. 80군데를 다 알바로 뛰니 그때 돈으로 하루에 약 15만 원을 벌었답니다. 졸업 때는 비싼 렌터카를 빌려서 학교로 달려갈 정도로요. 정말 난리가 났었죠(웃음).

그렇게 1년여간 렌터카를 타고 알바를 뛰는데 어느날 렌터카 사장님이 하루하루 빌리지 말고 차라리 차를 사라고 그러시는 바람에 제 생애 첫 LPG 자동차를 현금으로 사기도 했어요.

다방 아가씨들은 한 달 일하면 3일씩 집에 보내줬던 그시절, 그때마다 저는 먼 타지로 가는 누나들을 제 콜택시에 태워 고향으로 데려다 줬어요. 물론 올 때도요. 정말 죽으라고 달렸답니다. 전국으로요. 1년 동안 그렇게 하니까 13,000만 원 정도 모이더라고요.

그 돈으로 당시 부모님이 전세로 살고 계시던 집을 사 드렸어요.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죠. 전세자금을 모으면 반드시 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KBS 나는 남자다 출연 모습
KBS 나는 남자다 출연 모습

Q 하고 싶은 게 꼭 서울로 가야만 되는 일이었나?

시골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죠. 원래 제 꿈은 배우였어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엑스트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생애 첫 데뷔작이 바로 2002SBS에서 방영한 주말드라마 16부작의 유리구두였었지요. 끝날 때까지 얼굴 한번 안 나오는 지나는 행인역 말입니다.

제가 가장 잘 하는 게 또 청소아니겠습니까. 엑스트라 1회 때부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제일 먼저 출근해서 깨끗하게 청소부터 했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감독님께서 나오실 때마다 깔끔하니까 이거 누가 했냐?”며 저를 찾으시더라고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공인 7단인 제가 감독님 덕분에 야인시대안재모 역의 엑스트라를 직접 뛰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는데 저는 중고교시절 알바를 하고 저녁에는 체육관을 다닐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어요.

그후에는 강남 오렌지엔터테인먼트4인조 그룹 DNT 매니저를 했고, 후에는 당대 최고의 가수 몰라의 엄정화 씨 매니저를 했어요. 저까지 네 명의 매니저가 번갈아 가면서 운전을 했던 그 시절, 새벽에 나와서 지방부터 치고 올라가는데 얼마나 피곤하든지요. 어쨌든 열심히 하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입대를 했습니다.

Q 군 제대 후에도 여전히 배우를 꿈꿨나?

물론입니다. 제대하고 보니 연기 패턴이 너무 많이 바뀐 거예요. 설 자리가 없어서 한 3개월을 쉬었습니다. 그러다 인형 탈 알바부터 코스프레 알바라는 광고를 보게 된 거예요. ‘그래, 잠깐 경험은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첫발을 들여놨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너무 재미있지 뭐예요.

인형 탈을 쓰기도 하고, 풍선을 배우는 법을, 키다리 타는 법 등을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중에서도 유독 삐에로 아저씨 반응이 너무 뜨거운 거예요. 3년을 이벤트 회사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2010년도에 접어들면서 다시 내 고향 서산으로 내려오게 된 거예요. 나름대로 시장조사를 해보니 충남에는 이런 이색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더라고요.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내려오긴 했는데 장비 살 돈이 없는 거예요. 평일에는 대산공단에서 막노동했고, 주말에는 예전에 다니던 이벤트 회사에 얘기해서 장비를 대여하여 축제장마다 피에로 아저씨로 변신했어요. 그러면서 피에로 생활이 안정권을 유지하게 됐습니다.

Q 피에로를 하다 보면 기쁠 때도 있지만 슬플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슬프고 화가나도 웃어야 되는게 피에로의 삶이지요. 그걸 숨기기 위해 분장하는 거 아니겠어요. 슬픔이라고 굳이 얘기하자면 세상이 다 불만인지 이유 없이 욕을 하는 분들이 계세요. 풍선 받으려고 줄을 섰다가도 빨리 주지 않으면 괜히 침 뱉고 돌아서며 욕을 하고요. 그래도 어째요. 못 들은 척해야죠.

안타까울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많이들 아시지만, 예전에는 피에로 다리를 신은 줄 모르시고 본래 제 키가 그렇게 큰 줄로 아시는 분들이 많았죠.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셨어요. 어떤 분이 큰 키를 보시곤 진짜 사람 다리인 줄 알고 느닷없이 제 무릎 뒤를 냅다 찬 적이 있었어요. 난리가 났죠. 저야 겨우 피에로 다리에 스크레치 정도였지만 상대분은 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온 사고가 발생했어요.

이제는 오래 하다 보니 누가 만질 것 같단 느낌이 오면 재빨리 피하죠. 신경도 예민해지고요. 특히 제 눈은 사방을 경계하게 돼요(웃음). 이것은 생명의 위협과도 연관이 있거든요. 지금도 더러는 발로 툭툭 치는 분들이 계세요.

외국에서 주문제작해 온 LED 의상
외국에서 주문제작해 온 LED 의상

Q 코로나가 장기화하면서 행사가 줄어들었을 텐데 어땠나?

그동안 코로나지원금을 두 번 받았어요. 나가는 돈이 있으니까 간에 기별도 안 갔지만요. 일이 안 들어오니 먹고는 살아야 해서 대산공단에서 막노동을 했어요. 또 일선 학교에서 새 물건이 들어오면 태그 작업을 하는 일도 했고요. 근근이 살아나갔죠.

 

요즘은 그나마 연말이고 또 위드 코로나가 되면서 행사가 들어와 겨우 버티는 실정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어려운 것은, 올 초 1,200만 원을 투자해 LED 의상을 외국에서 직접 맞춰 들어왔어요. 행사 나갈 때마다 그 옷을 착용하고 나가는데 정말 장난아니게 좋아해주세요. 저도 기분 좋고요.

본격적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면 의상을 입고 서산시민들 곁으로 제일 먼저 달려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기대하십시오.

서산 버드랜드에서
서산 버드랜드에서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 버킷리스트 1번은 변하지 않은 배우입니다. 탤런트 김수미 선생님을 만났을 때 배우는 생명이 없다.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는 게 바로 배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길을 가기 위해 피에로 아저씨를 고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 일은 20년만 채우려구요. 동심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어른에게도 그렇고요.. 제가 나눠 드린 풍선 속에는 제 꿈도 함께 담겨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색 직업이라는 또 다른 장르를 하나 만들고 싶어요. 그게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그렇지만 조금씩 뭔가 감은 와요. 구체적으로 만들어질 때까지 계속 연구 개발할 예정입니다.

혹시 지나는 길에 피에로 아저씨를 보신다면 미소 한번 지어주세요. 힘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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