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소리꾼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 ‘낙원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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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소리꾼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 ‘낙원식당’
  • 박두웅 기자
  • 승인 2021.10.20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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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대읍성과 연계된 지역유형의 판소리문화와의 결합
2017년 12월.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은 본지를 비롯한 지역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사진은 철거 당시 현장 모습)
2017년 12월.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은 본지를 비롯한 지역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사진은 철거 당시 현장 모습)

서산시 읍내동 2-14번지. 전국 각지에서 예인들이 찾아오는 명소였던 낙원식당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필자가 철거되기 전인 2015년 가을에 찾은 구옥 낙원식당은 옛 율방(律房)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넓은 대청마루에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온갖 음식을 만들던 부엌도 그 규모가 컸다.

깊어가는 가을 밤, 전통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사로이 연주 활동을 하던 과거 율방의 모습이 상상이나마 즐거웠다. 전통적인 국악은 원래 대규모 궁중 연희를 제외하곤 풍류방(風流房)’ 또는 율방(律房)’이라고 부르던 사대부나 중인층의 사랑방에 가객을 초청해 음악을 즐기는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청마루에서 가객(歌客)과 금객(琴客)이 주거니 받거니 상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락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눈 앞에 선했다.

2017년 12월.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은 본지를 비롯한 지역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사진은 철거 당시 현장 모습)
2017년 12월.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은 본지를 비롯한 지역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사진은 철거 당시 현장 모습)

서산 중고제 판소리의 못자리 심정순

낙원식당은 우리 가무악을 지켜낸 아지트

심화영의 손녀이자 제자(전수조교)인 이애리 씨는 낙원식당을 유허지로 지정하려 했지만 토지주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고 말한다.

실제 일부 뜻 있는 분들과 심화영 선생은 지난 2005년 서산시 읍내동 2-14번지(85.98)에 대해 유허지 문화재 지정을 충청남도에 신청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중고제와 서산승무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컸다.

서산 중고제 판소리 소리 맥은 고수관·방만춘·방진관·김봉문·이동진 명창 등이 있어 가능했지만, 무엇보다 최근까지 서산 중고제 판소리의 명맥이 유지되어온 것은 지난 2009년 작고한 심화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창 심정순의 딸이자 가수 심수봉의 고모로 예인 집안의 가통을 이어오면서 판소리뿐만 아니라 춤사위도 뛰어나 심화영류 승무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도 했다.

심정순(沈正淳, 1873~1937)은 중고제 판소리 명창이요 가야금병창 및 산조 명인으로 널리 알려진 국악계의 거장이다. 그는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피리와 퉁소의 명인 심팔록(沈八綠, ?-1883)31녀 중 둘째 아들로 1873년 읍내동 학돌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전통연희와 창극의 무대였던 극장 장안사에서 박춘재, 문영수, 김종문, 김홍조 명창 등과 어깨를 겨루었고, 가야금 시나위, 춘향가, 심청가 등 초창기 유성기 음반에 상당한 녹음 기록을 남겼다.

1913년부터는 장안사순업대(長安社巡業隊)’를 이끌고 개성, 의주, 평양, 진남포 등 북한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1930년대 남도소리가 나오기 이전까지 유성기 음반의 가야금 병창은 대부분 심 씨 일가(심매향, 심상건)가 녹음했다고 할 정도였다.

심정순 의 족보는 이렇다. 심정순은 가야금병창과 산조의 명인 심상건(沈相健, 1889~1965)의 숙부이자, 가야금풍류·단소풍류·가야금병창·판소리의 명인 심재덕(沈載德, 1899~1967)과 가야금병창·판소리·잡가·승무의 명인 심매향(沈梅香, 1907~1927),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심화영(沈嬅英, 1913-2009) 남매의 부친이다.

그는 20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중고제 판소리 명창으로, 홍성 출신 한성준 선생 등과 교유하면서 충청·경기지역의 향토 음악적 어법을 충실하게 구사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평조를 많이 사용했으며, 계면조 대목에서도 평조적 진행을 보였다. 도약진행이나 장식음의 활용보다는 평탄하고 단조로운 선율을 지향했으며, 높은 음역에서 지속적으로 거뜬거뜬하게 들고 가며 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왕성한 활동은 끝내 그의 건강을 해쳐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는데 풍으로 인해 활동이 어렵게 되자 고향 서산으로 돌아와 읍내동에서 아들 심재덕과 함께 낙원식당을 운영했다.

철거되기 전 낙원식당의 옛 모습들
철거되기 전 낙원식당의 옛 모습들

서산의 낙원식당은 전통예인들의 사랑방으로 내포지역의 명소가 되었고, 당시 낙원식당에 드나들던 예인으로는 명창 이동백을 비롯 김창룡, 한성준, 이화중선 등 당대 내노라 하는 명인·명창들이 총망라되었다. 이처럼 낙원식당은 우리의 가무악을 지켜내는 아지트요, 전통예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러나 율방 낙원식당1930년대 들어 전통예술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감시, 핍박이 거듭되면서 심화영이 오빠 심재덕과 함께 청진으로 이사를 가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청진권번은 조선의 전통예인들이 핍박을 피해 집결해던 곳으로 한성준은 춤사범으로, 심재덕은 악기사범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청진권번 또한 1940대 초반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됐다. 심정순은 1937년 향년 64세에 타계했다.

철거되기 전 낙원식당의 옛 모습들
철거되기 전 낙원식당의 옛 모습들

심정순, 전통예술의 맥을 잇기 위한 분투기

일제강점기...‘우리 것을 지키려는 몸부림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20세기 초반 피리와 퉁소의 명인 심팔록으로부터 기예를 물려받은 심정순은 당시 서울무대를 쥐락펴락한 최고의 예인으로 인정받았다. 1910년대 초반 서구식 극장인 장안사 소속으로 이른바 심정순일행을 꾸려 지방순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1911년 음반취입을 하고, 신문연재, 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선구자적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런 심정순은 서구문물의 유입과 일제강점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우리의 가무악을 보전 전승하기 위해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내포제 거장 홍성 출생의 한성준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등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사라져 가는 전통예술의 맥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심화영 선생 10주기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쇠퇴해가는 조선 가무악의 침체는 그들로 하여금 민족예술을 보존 계승해야 한다는 책무를 일깨웠다. 이들의 노력은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 조선이라는 상호 이항대립적 노정에서 우리 것을 지켜내려 한 일종의 몸부림으로 간주된다고 밝힌 바 있다.

철거되기 전 낙원식당의 옛 모습들
철거되기 전 낙원식당의 옛 모습들

중고제 복원은 지역문화의 정체성 확보

기념비 설립 및 중고제 명창 생가터 발굴 등 필요

정노식鄭魯湜, 1891~1965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기록된 판소리 창자들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창자들 중에는 경기·충청 지역의 중고제 창자들이 특히 많다.

조선창극사에 기록된 19세기 경기·충청 지역의 창자들은 염계달(경기 여주), 모흥갑(경기 진위), 방만춘(충남 해미), 고수관(충남 해미), 김성옥(충남 강경), 김제철(충청), 이석순(경기 안산), 최낭청(충북 청안), 송수철(충남 청양), 임창학(충청), 한송학(경기 수원), 김정근(충남 강경), 윤영석(충남 오천), 정흥순(충남 한산), 백점택(충남 연기), 이창운(충청), 황호통(충남공주), 박상도(충남 공주), 김충현(경기), 김석창(충청) 등이다.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에는 이동백(충남비인), 김창룡(충남 서천), 심정순(충남 서산), 심상건(충남 서산) 등이 활약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명창들이 중고제의 맥을 이었고, 전라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동편제 및 서편제와는 다른 매우 독자적인 사설로 구성되면서 전체적으로 분명한 주제 의식의 차이를 보였다.

특이한 것은 20세기 전반 판소리는 근대화 및 산업화 등의 이유로 큰 변화를 겪게 되고, 그 가운데 사설의 내용 변화 및 유파를 초월한 정형화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중고제 판소리는 20세기 전반에 일어난 이와 같은 여러 변화들이 거의 수용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중고제는 일부 더늠의 형태로 다른 유파에 삽입되어 그 생명을 이어왔다. 대표적인 중고제 더늠으로는 고수관의 <춘향가> 자진사랑가’, 염계달의 <춘향가> 남원골 한량’, ‘네 그른 내력’, <수궁가> 토끼 욕하는 대목등이다. 또한 염계달이 판소리에 도입한 경드름과 추천목은 경기 음악어법에 기반을 둔 것으로, 판소리의 기본 악조인 우조·평조·계면조 이외에 독특한 분위기와 선율 진행을 통해 판소리의 표현력을 넓혀 주었다.

이처럼 중고제 판소리는 200여 년이 훨씬 넘는 판소리사 전체를 살펴볼 때, 판소리의 다양성과 표현력 확대 등의 측면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1980년대 후반부터 학술대회를 통해 중고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고,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 중고제의 역사적인 근거를 중심으로 복원을 추진하다가 지자체의 지원 부족, 근거자료의 한계로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다행히 최근 중고제를 문화콘텐츠로써 활용하기 위해 연구와 복원이 진행되면서 각종 공연 기획, 유성기 음반 복각, 기념비 설립 및 중고제 명창 생가터 발굴 등 다양한 복원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이와같이 충청 각 지자체의 노력으로 인해 중고제의 전승기반이 마련된다면, 중고제는 계면이 심한 현대 판소리와 다른 미적 특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 판소리 문화에 새로운 음악 양식으로 변화 될 가능성이 있다. 중고제 복원의 가치는 지역문화의 정체성 확보에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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