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온 김금선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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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온 김금선 씨 이야기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10.0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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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보고픔에 가슴이 쭉쭉 찢겨졌던 시간들, 아코디언을 만나면서 행복을 찾게 됐다!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온 김금선 씨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온 김금선 씨

글을 열면서

북한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가 신분 없이 살았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자유 대한민국이 저를 받아줬습니다. 지금은 너무 행복합니다. 이렇게 좋은 나라가 내 나라가 되다니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아코디언으로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한쪽 고막이 터져서 악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도 그저 음악 하나만 있으면 모든 시름 다 놓고 빠져들 수 있다는 김금선 여사. 지난 3일 북한에서 사선을 넘어 탈북한 그녀를 만났다.

처음에는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라고 교육받아 모두 나쁜 사람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지제도가 좋은 나라가 또 있을까요. 말 통하고 정붙이며 사는 이곳이 저는 제일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Q 언제 남한으로 내려왔나. 어린 시절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면?

200910월에 자유의 품으로 안겼다. 내 고향은 철책을 사이에 둔 북조선이다.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 슬하에 7남매 중 여섯째로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지독한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그런 남편 대신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협동농장에서 벼농사 일을 하며 가정을 꾸리셨다.

1960년 당시만 해도 북에서는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이었다. 우리 집은 늘 가난했지만 그래도 의무교육 덕분에 별 걱정 없이 9년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때가 김일성위원장이 생존해있을 때였다.

당시 나라형편은 괜찮았지만 우리 집은 어머니 혼자 일하셨기에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교육열이 남달랐다. 북에서는 근면·성실하고 모범생이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추천을 받았다.

당시 우리 반은 남자 19, 여자 22명이 졸업을 했는데 그중에서 겨우 세 명만 대학에 입학했다.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내가 포함됐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셋째 오빠와 함께 대학을 다니는 동안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비록 일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의지하는 마음이 깊었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 삽시간에 뿌리가 흔들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남한으로 넘어와 아코디언을 배웠던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김금선 씨. 서산 예천주공2단지 경로당에서 '통일아리랑 예술단'  공연 중 모습
남한으로 넘어와 아코디언을 배웠던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김금선 씨. 서산 예천주공2단지 경로당에서 '통일아리랑 예술단' 공연 중 모습

Q 6개월만에 대학을 포기했는데 이유는 뭔가?

위장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협동농장에서 엎드려 손으로 논바닥을 기어가며 김을 매던 어머니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벼 잎에 그만 눈동자를 베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 일로 어머니의 한쪽 눈은 실명이 되셨고 나는 어쩔 수 없이 6개월 만에 대학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협동농장으로 나가게 됐다. 나가보니 18살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도 많았는데 그 친구들은 일이 힘드니까 대부분 일을 하다가 바로 출가를 하는 게 상례였다.

그렇지만 나는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협동농장에서 일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은 어머니의 사고로 우리 집에선 내가 가구주가 되어 셋째 오빠의 대학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고, 더군다나 한쪽 눈을 실명한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협동농장 김일성 혁명사 연구실에서 청소를 하는 관리원으로 근무했고, 바로 옆 건물에 있는 리당 사무실에서 이따금 내부서류를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Q 그럼 언제까지 협동농장에서 일을 했나?

십여 년 하다가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뒀다. 언니 소개로 군관에게 시집을 갔고 슬하에 형제를 낳았다. 한동안은 그래도 행복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겨울 동계훈련 마치고 고속도로 건설장에 나갔던 남편이 급성신장염으로 사경을 헤매면서 행복도 막을 내렸다.

남편은 두만강 옆을 끼고 있는 조그만 도시로 낙향하게 됐고 그나마도 상좌 출신이라 취직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가세가 기울어져 끼니를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장사를 하려고 했지만 간부 가족들이 장사하면 위신 떨어진다며 감시의 눈초리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게 안 되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국 몰래 쌀이 많이 나는 황해도 장사꾼에게 식량을 넘겨받아 시장에 좌판을 폈다. 밑천이 없으니 장사가 수월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벌어야 했기에 무작정 그 일을 해나갔다.

굶어 죽으나 붙잡혀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장사라도 하면 몇 푼은 아이들 입으로 들어가니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 뭐라도 벌어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텃밭에 심은 채소를 등짐에 지고 시장에서 팔았고, 시골에서 야채를 매고 나오는 아낙들에게 흥정해서 푸성귀를 받아다 팔기도 했다.

봄이면 시내에서 3시간을 걸어 비탈진 산에 가서 밭을 일궈 콩과 채소들을 심었다. 김도 매야 하고 비료도 줘야 하고. 자주 드나들 수 없어 비닐을 가져다 움막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무섭지도 않았다. 너나없이 다 그렇게들 살아가니 해가 갈수록 되려 반가운 얼굴들도 하나둘 생겼다.

북한은 개인산이 없다. 농사를 짓다 보니 그런지 산불도 어쩜 그리도 많이 나든지... 불이 나면 그곳에는 어린 소나무 묘목을 심었다. 금방 크지 않으니 적어도 7~8년은 족히 농사를 지어 먹도록 묵시적으로 허용해줬다.

태안 원북면 '국화향기 나눔전'에서 아리랑예술단 단원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태안 원북면 '국화향기 나눔전'에서 아리랑예술단 단원(오른쪽 두번째)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Q 먼 곳으로 농사를 지으러 가면 아이들은 누가 챙겼나?

친척들 집을 전전긍긍하면서 떠돌아다녔는데 감사하게도 그분들이 챙겨주곤 했다. 그래도 이 엄마를 잘 이해해주고 착하게 바르게 열심히 공부하며 생활해줬다.

우리 애들만 생각하면 밤을 낮 삼아 살아도 힘들지 않았다. 비록 잘 먹이지 못하고 키웠지만, 원망도 하지 않았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흉년이 들면서 그렇게 잘 자라던 우리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장사 밑천조차 없어 동동거렸지만 다들 힘들다 보니 서로 받쳐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대학을 대학 추천을 받았지만 집 형편이 안되어 입대를 먼저 선택하게 됐다. 그때도 여전히 옥수수밥이 주식이었지만 가난도 당하다 보면 근육이 생기더라. 그렇게 두 아이를 군대에 보내게 됐다. 그즈음 남편의 지병이 다시 도져 그나마 조금 모은 장사 밑천도 또다시 약값으로 모두 날아가 버렸다.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약이 없어 처방전만 받아가지고 시장에서 약을 구입해서 먹었다. 차도가 조금 있긴 했지만 병환은 여전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장사밑천까지 바닥을 드러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Q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면서 중국으로 돈을 벌러 떠났을때 가족들과는 연락하면서 지냈나?

힘든 정도가 아니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도 중국으로 나오기 전 이미 두 아이들이 입대를 했기에 부담감은 적었다. 북에서는 10년 의무병으로 복무를 했기에 남편만 챙기면 됐다.

어느날 생각하니 아들 둘이서 제대하면 그 후는 어떻게 될까?’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깊은 고민 끝에 마음을 굳혔다.

애들 아빠에게 중국으로 들어가 군대 있을 동안 대학 보낼 자금을 벌겠다고, 3~4년 정도만 고생하면 장사 밑천도 만들어 올 수 있겠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남편 형제들에게는 더 이상 방도가 없다.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신랑 잘 돌봐달라고 당부했다.

그때 멀찍이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던 남편이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나도 덩달아 가슴이 아파와 눈을 들 수가 없었다.

조용히 다가가 장사하러 떠난다. 나 없는 동안 좋은 여자 있으면 만나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데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두 아들을 낳으며 서로 아끼던 사이 아니었나. 그렇다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내를 무조건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옷깃을 여미며 돌아섰다. 그리고 중국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남편과 전화 연결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남편은 몸조심하라고 했고, 나는 그이에게 건강히 지내라고 했다.

실버빌 주간보호 선터에서 아코디언 봉사를 하는 김근선 씨(오른쪽)
실버빌 주간보호 선터에서 아코디언 봉사를 하는 김금선 씨(오른쪽)

Q 그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신분이 없으니 늘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왔으면 불법 입국자라 잡히면 무조건 북송되고 그후에는 교도소로 들어간다는 말이 떠돌았다. 돈을 벌 목적으로 들어갔으니 당연히 중국어를 배워야하는 건 당연했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말 번역 사전을 빌려다 옮겨썼다. 그러면서 현지인과 부대끼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국어로 소통도 가능하게 됐다.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며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조금 편해지나 싶었는데 아뿔싸, 북한에서 워낙 등짐을 지고 장사를 다니다 보니 그랬나 허리디스크가 다시 도지는 일이 발생했다. 심지어 앉았다가 일어나지도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결국 보증금도 포기한 채 일을 그만둬야 하는 신세가 됐다.

몸은 몸대로 허물어져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을 때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다. 이대로 북으로 들어간다면 살아날 재간도 없었다. 과감한 결단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그렇게 태국을 거쳐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게 됐다.

60일 만에 한국에 도착한 내 몰골은 마를 대로 말라서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아니 54년 세월 동안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던 상태였으니 그런 모습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버이날기념 수석동 어르신 효잔치 공연
어버이날기념 수석동 어르신 효잔치 공연(오른쪽에서 두번째)

Q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나? 가족들 생사는 들었나?

처음에는 굉장히 무서웠던 것 같다. 이제는 이해가 가지만 그때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온기가 느껴졌다. ‘, 내가 살을 비비며 살아도 될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처음으로열심히 벌면 먹고 입을 것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니 몸은 미치도록 행복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여전히 마음은 북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나중에 소문으로 듣자 하니 남동생 혼자 남고 나머지 5남매는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그럴 나이도 안됐는데 싶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당시 군대 갔던 아이들은 다들 장가가서 자식들 낳고 그럭저럭 산다는 말도 들었다. 한편으론 뿌듯하다. 그래도 죽기 살기로 번 돈이 장가가서 번듯한 가정까지 꾸리는 자금으로 쓰였다 생각하니 어미로서 그저 다행스럽다.

남편 역시 착한 사람 만나 잘 산단다. 꽉 맺힌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듯 쏴 하다. 나는 비록 혼자지만 남자가 혼자 살기는 힘든 세상이다. 그렇게라도 서로 챙겨가며 산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Q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이 여전히 많은 듯하다.

한때는 지나다니는 남자애들만 봐도 북에 둔 아들 생각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우울증이었다. 집에 들어가도 불도 켜지 않은 채 냉골에 몸을 눕혔다. 가만히 있어도 그리움과 보고픔에 가슴이 쭉쭉 찢어졌다.

그때 만난 것이 아코디언이었다. 얼마나 정겨운지 악기만 품에 안아도 온갖 시름 다 날리고 그저 즐거웠다. 때때로 보고픔이 스멀스멀 올라 올 때면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말한다.

세월이 좋아지면 만날 거다. 내가 애들 걱정하고 있다 해서 어떤 도움이 되겠나. 너도 애들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니 다 내려놓고 살아라.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내 안의 소리를 듣고는 이제 편안해졌다. 퇴근하면 운동도 하고 아코디언 연습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서산 호수공원에서 아리랑 예술단 창단 1주년기념 공연
서산 호수공원에서 아리랑 예술단 창단 1주년 기념 공연

Q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은.

큰 거 바라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너무너무 좋다. 일하면서 짬내어 어르신들게 아코디언 음악봉사를 한다. 이런 삶이 최고다.

한때는 모텔에서 청소일을 했고, 요양원에서 어르신들 수발을 들기도 했다. 그때 허리협착증이 도저서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입퇴원을 반복하며 조금씩 건강을 되찾았고 지금은 방문요양일을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행복하기 위함이다. 내가 적성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지금 하는 여유시간의 봉사도 내겐 안성맞춤이다.

나는 어차피 두 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내가 뭘 더 바라겠나. 아라메음악봉사단에서 시간나는대로 사람들 앞에서 아코디언을 치며 내 생의 마지막을 평안히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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