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엄마의 200점 도전기 75

나와 열 살 차이났던 조카
나와 열 살 차이났던 조카를 사람들은 꼬마 김건모라 불렀다.

열한 살이 되던 해 조카 영재가 태어났다. 나와는 겨우 열 살 차이, 늦둥이 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조카였다. 함께 커 가는 처지였지만 딴에는 이모라고 나는 영재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이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한 숟가락씩 얻어먹는 분유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첫 손자인 영재는 가족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고 당연히 나에게도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언니는 영재의 패션에 각별한 신경을 썼는데 두건을 씌우고 선글라스까지 낀 영재에게 사람들은 꼬마 김건모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김건모의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영재가 외가에 오는 날이면 집안 전체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재가 외가에 오는 날이면 집안 전체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재가 외가에 오면 언니의 활기와 어린 아이 특유의 기운이 맞물려 집안 전체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영재가 가야 하는 날이 되면 헤어짐이 서운해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방학 때 충주 언니 집에 놀러 갔다가 다섯 살짜리 영재를 데리고 버스로 경주까지 내려 온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고작 중학생이던 동생에게 5살 된 아들을 맡긴 언니도 신기하고, 부모와 선뜻 떨어져 이모를 따라나선 조카도 신기하고, 세상물정 모르면서 5살 조카를 책임졌던 나도 신기하다(25년이 지난 현재 나의 시점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고속버스에서 오줌이 마렵다는 조카를 위해 페트병에 오줌까지 누여가며(남자애라 얼마나 다행인지!) 먼 길을 내려와 일주일간을 주 보호자로 지냈다. 미운 5살을 실감할 만큼 말을 지지리도 안 듣던, 곧 이어진 명절에서 친척들까지 혀를 내두르게 만들던 장난꾸러기 영재는 자라면서 가끔 나를 이모대신 누나라 부르기도 했다. 나이 차로 보건데 이모보다는 누나와 가까우니, 저도 모르게 누나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 영재도 무럭무럭 자랐다. 그 사이 영재로 불리던 아이는 이름을 선우로 개명했고 초··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고민 끝에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했다. 공교롭게도 스무 살에 사회인이 된 선우와 대조적으로 막내 이모인 나는 서른 살에 임용을 준비하는 고시생이 되었다.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이모에게 정 많은 선우는 첫 월급을 받아  용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선우가 영주를 만나 일찌감치 결혼을 하더니 딸 라엘이를 낳았다.
선우가 영주를 만나 일찌감치 결혼을 하더니 딸 라엘이를 낳았다.

그런 선우가 짝을 만나 일찌감치 결혼을 하더니 예쁜 딸을 낳았다. 나는 이번에도 39세의 젊은 나이에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 조카가 커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듯이 이번에는 조카를 닮은 조카손녀를 지켜볼 차례다.

내달 14일이면 첫돌을 맞는 손녀 라엘이의 모습
내달 14일이면 첫돌을 맞는 손녀 라엘이의 모습

나의 첫 조카손녀 라엘이는 다은이와 6, 다연이와는 겨우 3살 차이가 난다. 어디 가서 조카라 해도 믿을 법한 손녀다.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에 같은 성별이라 카시트, 유모차, , 장난감, 책 등 많은 것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버리거나 남 주기 아까운 물건들을 혈족에게 물려줄 수 있어 좋고, 받은 물건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그것대로 또 고맙다.

 

다은, 다연이에게 라엘이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아기가 웃고 우는 모습을 웃음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매가 당숙이라니 내가 할머니 된 것보다 더 신기하다. 자주 만나기만 한다면 라엘이와 다은, 다연이는 사촌 같은 오촌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라엘이도 가끔 다은, 다연이를 언니라고 부르겠지? 정확한 호칭이 있겠지만 셋이 그저 언니처럼 동생처럼 그렇게 지내주면 좋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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