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유리의 성’을 만든 주인공 ㈜삼우지앤티 유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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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유리의 성’을 만든 주인공 ㈜삼우지앤티 유상진 대표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9.16 2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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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재능보다도, 힘보다도, 인내라고 한다. 나는 그것에 하나를 더 보태 성취감이라 말하고 싶다!”
유리의 성’을 만든 주인공 ㈜삼우지앤티 유상진 대표
유리의 성’을 만든 주인공 ㈜삼우지앤티 유상진 대표

#프롤로그

잘 꾸며진 실내에 들어서자 ㄱ자 유리 벽면이 자연채광을 받아 은은하니 아름답다. 블라인드 너머 간간이 비치는 창을 통해 넓은 숨을 쉬고 있는 유리제조 작업장이 눈에 보였다.

입구 왼쪽으로는 삼우지앤티 대표이사이자 유리 조형물을 제작한 유상진 작가 작품 기다리게 하셨으니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사무실 안에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들이 군데군데 잘 진열되어 그가 작가였음을 알려주었다.

같은 농공단지 안에 있으면서 형님이 하고 계신 유리공장 회사 이름이 이호라는 게 너무 이쁘다는 말에 삼우지앤티 유상진 대표는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 부근에 있는 이호리가 본적 주소지라고 말했다.

지난 13일 서산시 수석산업로 22-7에 위치한 곳에서, 20년 전 교사직을 그만두고 형님을 따라 유리업계로 들어선 그를 만났다. 제주도 유리의 성을 만든 장본인이자 대한민국의 유리 조형물을 선도해온 유 대표에게 유리에 얽힌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유리로 인생을 바꿨다는 유상진 대표
유리로 인생을 바꿨다는 유상진 대표

Q 한때 유 대표님은 유리 조형물 하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우리나라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교사를 그만두고 유리업계에 뛰어들었는데 계기는?

솔직히 어찌하다 보니 교사직을 그만두고 형님이 운영하시던 유리업계로 들어왔다. 처음엔 적성에 맞지 않아 무진 애를 먹었다. 속된 말로 막 미쳐서 돌아버릴 것 같다는 표현이 맞았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거래처나 직장에서 밥이나 술을 먹자고 하면 절대 나가지 않았을까. 저녁에 만나봐야 지겨운 유리 얘기를 또 들어야 될 테고. 상상만이라도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나는 미술 교사모임에 나갔다. 미술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일단 생기가 돌면서 에너지를 받았다. 그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먹고 자다가, 새벽에 출근하는 날이 반복되는 시간을 10여 년 보냈다.

고민을 하던 찰나, 사무실로 배달된 유리 신문을 우연히 손에 쥐게 됐다. 국내 최초 유리조형대학원에서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밝아오면서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이거 딱 내 건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바로 면담을 요청했다. 사실 나는 목원대 미술교육과 조소를 전공했었다. 그러니 얼마나 굶주리고 있었겠나. 활자를 보는 순간 내 눈이 번쩍 띄었다. 마치 나를 위해서 만든 과란 생각이 들었다.

Q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면서 야간대학원까지 다닌다는 것이 힘들지 않았나?

안 그러면 내가 죽겠는데 피할 수 없는 선택 아닌가. 일주일에 두 번 야간에 대학원을 다녔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퇴근하고 학교를 가기 위해 차에 타는 순간 사업에 관한 모든 것은 내 머릿속에서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곧바로 코드를 뽑아버렸다.

더 신기한 것은 천안으로 향하는 동시에 내 뒤통수로 멀어져가는 건물. 그 순간부터 텐션이 막 올랐던 기억이 있다.

뭘 배운다는 의미보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함께 꿈을 키워나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한 그룹이 되어 대화하고 한 곳을 바라본다는 자체가 내겐 더없는 행복이었다.

제주도
제주도 "유리의 성" 전경

Q 제주도 유리의 성을 직접 만들었다고 들었다. 당시 얘기를 해달라.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는 가능성이 있을까 반신반의했었다. 1년에 한두 번씩 넘어오는 태풍에 유리로 만든 야외조형물이라니. 과연 바람에 견뎌낼 수 있을까? 한 번만 탁 쳐도 박살이 날 텐데 어떻게 유지는 가능할까? 계속 불안해했다.

내 마음과는 달리 그곳 대표님은 어찌나 배포가 크시던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직원들과 덮개로 덮으면 된다는 말씀을 하시더라(웃음). 그렇게 시작한 것이 유리의 성이었다.

당시 제일 힘든 것은 유리를 운반하는 것. 11t 차로 20여 대 분량이 제주도로 옮겨졌다. 나는 유리의 성 가까운 곳에 펜션을 얻어 연구소에서 도면이 나오면 그것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내 속에 불타오르던 예술의 혼이 제대로 작품 속에 녹아 들어 예술로 승화됐다. 지금도 제주여행을 하면 머릿돌에 새겨진 내 이름 석 자 유상진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마다 심장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한때는 유리공장에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 늘 갈등했는데 유리작품을 하면서부터는 내 업종에 대한 자부심이 그렇게 클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내가 만약 유리업체를 운영하지 않았다면 이런 작품들이 세상에 나올 수나 있었을까.

이제는 제주 관광에서 유리의 성은 하나의 관광명소가 됐다. 더구나 아직 (유리)박살이 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천만다행이다(웃음).

남서울대학교는 유상진 대표가 직접 만든 유리 조형물이 정문에 세워져 있다.
남서울대학교는 유상진 대표가 직접 만든 유리 조형물이 정문에 세워져 있다.

Q 당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기억나는 것 몇 가지만 또 말해달라.

우리나라 최초 유리조형대학이 만들어진 남서울대학교를 가보면 정문에 특이한 유리 조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천 장의 유리에 조명을 집어넣은 기둥이 학교 앞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정말 고생을 무지했다. 그뿐만 아니다 단국대학교 정문에 세워진 유리도 직접 설치했다.

이렇듯 유리작품을 하다 보니 유리 전문작가들이 여기저기서 수소문하여 나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유리하면 서산이 제일 먼저 알려졌었던 시기가 바로 2007년도인 것 같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클라이언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참, 정말 기억나는 체코인 클라이언트가 문득 떠오른다. 당시 그는 인사동 화랑에서 초대를 받아 한국으로 나온 유리작가였다. 유리라는 소재는 워낙 덩치가 크니까 체코에서 가져오지 못하고 서산에 있는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 계기로 그의 작품을 디자인한 적이 있다. 마치 이심전심이 되어 작품을 만들었고 설치하면서 상당히 뿌듯했었다.

뒤로 보이는 조형물이 유상진 유리조형 작가가 직접 만든 작품
뒤로 보이는 조형물이 유상진 유리조형 작가가 직접 만든 작품

Q CEO이자 학생, 작가로 일인다역을 했는데 힘들지는 않았나?

물론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일탈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오래전에 유리업계를 그만뒀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구해준 것은 학업이었다.

내가 만약 유리 조형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내가 만약 유리를 소재로 하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나는 교단 위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학생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을까.

당시 주변에서는 바쁜 와중에 학교를 다니는 나를 두고 저거 생뚱맞은 걸 왜 하냐”, “회사도 바빠 죽겠는데 뭐 하러 학교는 다니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전국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나를 찾아 먼 길을 달려오니 그때서야 그 말이 쏙 들어갔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형님의 이호 공장은 공장대로 확장이 됐고, 그 뒤를 이어 나는 서산농공단지 내 삼우지앤티 유리공장을 새롭게 설립했다.

나는 사실 유리 가지고 해볼 건 원 없이 다 해봤다. 한때는 유리만 보면 도망갈 생각을 했는데 세상 참 재밌지 않나(웃음).

유상진 작가 작품
유상진 작가 작품

Q ‘SOLO EXHIBITION 유상진소책자를 보니 작품들이 대부분 종교적인 조형물들이 주를 이뤘다.

벌써 오래된 얘기다. 2003년 가을에 모란갤러리에서 전시됐다. 당시 내 작품들은 주로 종교적인 내음이 물씬 풍기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나는 조형물 속에 강렬한 나만의 메시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작품집을 보면 아시겠지만 나는 모태 신앙인이다. 우리 어머니는 한결같이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어머니의 기도는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고, 덕분에 우리 회사는 돈 한 푼 없이 시작하여 여러 번 고비를 넘기면서도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됐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때 전시된 작품들은 주로 주님 말씀을 인간 본질에 대한 감성적 기억들과 융합하여 탄생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일그러진 내면과 기념비적 형상, 구원을 받고자 하는 처절한 우리들의 모습 등을 현실감 있게 조형화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속 삶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주)이호 공장의 내부 모습
(주)이호 공장의 내부 모습

Q 이제 유리작가에서 다시 유리업계 CEO로 돌아왔다. 지금 마음가짐은 어떤가?

한때는 방황하며 일탈이란 걸 해보기도 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운 것처럼 부단히도 노력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이제는 이 업계에서 이름깨나 날렸다. 처음에는 세 명의 직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모두 60여 명과 함께 우리 서산에서 향토기업을 하고 있다.

지금은 작가의 길보다 CEO로서 어떻게 하면 직원들이 마음 놓고 일하면서 삶을 디자인해줄까를 더 고민한다. 사실 생계를 내팽개치고 나 좋자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쫓아다닐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조금 아쉬웠던 부분은 건축학디자인이다. 유리를 하면서 발견한 것이 있다면 바로 내가 건축학적 디자인에 소질이 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다. 물론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라도 배우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건축에 관련된 디자인을 보면 막 어깨가 들썩거린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 길을 걷기까지 혼자서 참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하지 않나. 교사였던 아버지를 바라보며 내가 가야 하는 길도 역시 교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형님이 운영하는 유리업계로 들어왔고, 10여 년을 내게 맞지 않은 옷이라 생각하며 끝없는 방황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조형물을 만들면서 무엇보다 유리라는 소재가 내 생애 나와 가장 잘 맞는 옷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여태 몰랐으면 어쩔 뻔했을까.

유리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재능보다도, 힘보다도, 인내라는 얘기가 있다. 나는 그것에 하나를 더 보태 성취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을 일로만 생각하면 확신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지 않으면 그저 고된 직업에 머물고 만다. 아직 의미없이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만약 계시다면 반드시 일에 대한 의미를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의미를 찾을 때만이 그 일이 자기 것이 된다.


유리조형작가미며 CEO인 유상진 대표는 언제까지 유리사업을 계속할 수는 없다. 내가 이 업계를 떠나게 되는 날, 다시 유리 조형물을 만들어 많은 사람과 전시를 통해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앞날이 내내 여여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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