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우 전문 사진작가 최차열 선생의 ‘우리 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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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우 전문 사진작가 최차열 선생의 ‘우리 소 이야기’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9.07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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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애환과 진솔함이 묻어있는 한우는 내게 가족이었다”
한우 전문 사진작가 최차열 선생
한우 전문 사진작가 최차열 선생

오후 세 시, 맥간공예 명인이자 40년 지기 소()들의 친구 최차열 사진작가와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했다.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 가장 많이 쓴 단어 세 개는 역사·가족·동행이었다.

소는 내겐 가족이었지만 우리 부모님에겐 자식보다 우위였던 존재였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없어도 소에게만은 싱싱한 풀을 먹여야 했다. 특히 외양간은 화장실보다 가까운 곳에 두고 가족의 일원으로 대했다.

우리집 재산 목록 1호인 소는 그렇게 이동 수단이자 성인 남성 여섯 몫을 해내는 중요한 농기구로, 또 귀한 먹거리로, 가족으로, 그렇게 우리 곁에서 동고동락하며 살아갔던 특별한 존재였다.”

5일 만난 최차열 작가가 소의 아버지로 우뚝 선 것도 그리하여 탄생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백두산, 독도, 계룡산의 사계와 프란체스코 교황 사진전 등 12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특히 교황 사진전은 종교를 뛰어넘어 교황님을 근접에서 찍었다는 그는 나는 상당히 운 좋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서산에 살지 않았다면 이런 사진을 결코 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우리 소 韓牛이야기’를 전시하면서
지난 7월 ‘우리 소 韓牛이야기’를 전시하면서

Q 맥간공예 명인이면서 올해 우리 소 韓牛이야기’ 12번째 사진전을 가졌다. 먼저 축하드린다. 재주가 남다르신데 어떻게 사진을 하게 됐는지.

학창시절에는 그림이나 판화로 우승을 독차지했다. 일화가 하나 있는데, 중학교 때인가 당돌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를 연필로 어설프게 스케치해서 주소를 적어 청와대로 보냈다.

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이 타자를 쳐서 직인과 함께 답장을 보내왔다. ‘최차열 군께서 보내주신 초상화는 대통령께서 직접 받아 보셨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나라의 큰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해미중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교장 선생님께 불려 다니며 해명을 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부터인가 사진에 매료됐다. 당시 사진관 앞을 지날 때마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액자 안에 끼워져 있는 사진들이었다. 카메라를 사달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5남매의 막내가 떼를 쓰니 결국 중3 때 사진관에서 중고 카메라 한 대를 구입해 주셨다.

뛸 듯이 기뻤지만 가난한 집안에 돈이 어디 있겠나. 필름 살 돈과 현상을 할 수 없어 사진관 아저씨께 사정하여 심부름을 해주기도 했다. 까까머리 중학생의 렌즈 속 세상은 별천지였다.

나는 점차 카메라로 세상과 소통을 하여 나갔고, 그 과정에서 한우를 만났다. 나는 서서히 소들의 매력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인간과 동행하는 소
인간과 동행하는 소

Q 옛날에는 농촌 보물 1호가 바로 소였다. 소를 팔아 전답을 사고,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고 결혼을 시켰다. 대한민국 누구나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소를 전문적으로 카메라에 담은 이유가 궁금하다.

소만을 전문적으로 찍은 건 아니고 다양한 장르를 촬영하다 보니 특별히 좋아하는 주제가 됐을 뿐이다. 소만 보면 어릴적 추억이 떠오르면서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과 동고동락하며 살았던 소는 부의 상징이자 농사일을 돕는 상머슴으로 대접받았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인의 소리와 눈치, 고삐의 교감과 대화 속에 살아가는 보물 1호였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나는 소를 데리고 나가 논둑이나 밭둑, 냇가 등 풀이 많은 초지를 찾아다니며 넉넉히 풀을 뜯어 먹여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로부터 ()뱃구레 검사를 받아야 했다. 만약 소의 배가 제대로 일어서지 않은 날이면 풀도 안 뜯기고 놀다 왔다며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 날은 여간해선 표시도 나지 않는 소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엔 불룩해진 소의 뱃구레를 만져보시는 아버지가 빙긋이 웃는 날도 있었다. 그날은 나도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졌다.

새로운 초지를 향하여 다리를 건너는 소
새로운 초지를 향하여 다리를 건너는 소

Q 어린 시절 소와 관련된 일화를 들어보고 싶다. 어떤 것이 있을까.

해미면 동암리 골짜기에서 서산 시내 우시장까지는 장작 30리 길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소를 팔러 가는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이별이고 뭐고 간에 어련히 소는 그렇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풀을 뜯어 먹이며 잘 키운 소를 내일이면 내다 팔아야 하는 날, 때로는 나를 힘들게 했던 소였지만 막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조금 아팠던 것 같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새 신발과 가지고 싶었던 학용품을 살 수 있다는 것에 슬픔보다는 기쁨이 먼저였던 것 같다.

당일 새벽, 잠 많던 내가 눈을 비비며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와 함께 우시장의 맛있는 국밥을 먹을 수 있었고, 따라가면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선물 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런 행복감에 새벽 단잠에 따라나섰던 것 같다.

새벽녘 활기찬 우시장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우리 집 보물 1호의 멀어져가는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듯한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도 새로 살 운동화의 유혹은 늘 슬픔을 견디게 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는 소를 팔아 땅을 살 밑천을 만들었고, 우리 5남매의 교육비를, 결혼 자금 등을 만들어나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시장은 민초들의 삶이 켜켜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연과 하나 된 소
자연과 하나 된 소
서산목장 소떼들의 행렬
서산목장 소떼들의 행렬

Q 사진을 찍으면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서산에서 살지 않았다면 절대 담을 수 없는 ‘1998년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암소만 선별하여 통일소 1001마리의 목에 노란 목걸이와 소방울을 달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나는 역사적인 사진을 담기 위해 뛰는 가슴을 안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사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고향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다. 그곳에서 회장은 나이 17살 때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가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돈이 결국엔 종잣돈이 되어 지금의 현대그룹으로 성장시켰다.

1992, 정주영 회장은 서산 간척지 70만 평의 서산목장에 3,000여 마리의 소를 키웠다. 그것은 순전히 목장을 하겠다는 의도보다 통일소를 가지기 위한 작업이었다.

19986500마리, 10501마리를 몰고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소떼 방북을 했다. 2차례에 걸쳐 1001마리의 소가 북한으로 보내졌는데 그 이면에는 정주영 회장만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향을 떠난 지 66년 만인 1998년 소 한 마리에 이자 격으로 1000마리를 합쳐서 1001마리의 소 떼를 몰고 고향을 방문한 것이다. 그 속에는 남북 평화실향민으로서의 간절함도 들어 있었다. 지금도 노란 목걸이를 한 당시의 소 사진을 보노라면 가슴이 벅차온다.

웅도 갯벌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우마차
웅도 갯벌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우마차
웅도의 우마차 행렬
웅도의 우마차 행렬

Q 작가님의 웅도리 우마차 행렬작품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그 당시 얘기를 해달라.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는 섬마을 주민들에게도 소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경운기는 해풍에 녹이 나고 삭아서 오래 쓰지 못한다. 하지만 우마차는 엔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만 건강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웅도 주민들은 서너 집 모여서 우마차 하나에 몸을 싣고 (바다)작업장으로 떠났다. 물 빠진 바닷길을 걸어 도착하면 소들은 싣고 온 짚단을 먹으면서 유유자적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물 들어오기 전에 작업을 마친 주민들은 한 가구당 두 자루 정도의 바지락을 우마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본 우마차 행렬은 지금은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삶의 현장이었다. 2m 간격으로 곡선을 그리며 뭍으로 돌아오는 그 장면은 TV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당시 찍었던 작품 외 20여 점을 웅도리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우마차 행렬은 그렇게 웅도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고, 당시 사진 속 절반의 어르신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백로와 한우
백로와 한우
백로와 한우
백로와 한우

Q 소 사진을 찍으면서 유난히 감동적일 때도 많았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소들의 풀밭 출산이다. 소는 약한 동물이다 보니 주로 무리 지어 다닌다. 그러다 풀밭에서 새끼를 낳을 때가 종종 있는데, 이때는 무리 지어 가는 소 몇몇이 다시 돌아와 산모 옆에서 태를 같이 청소해 주는, 산파 역할을 해 준다. 동물들은 태를 두면 다른 동물들이 냄새를 맡고 찾아와 피바람을 흘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수시로 드나들다 보니 목부들과도 친해져서 출산 날짜를 미리 알려올 때도 있고, 또 내가 출산일을 어느 정도 가늠하여 자주 카메라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또 하나는, 19967월 홍수로 인하여 북한의 황소 한마리가 한강으로 떠내려 왔다. 비무장지대 유도에서 구출되어 제주 우도 신부와 결혼, 여러 마리의 자식을 두었다. 그 후 평화의 소로 불리는 후손들은 어머니 소의 고향 제주 우도에서 아버지 소의 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몇차례 우도를 찾아 평화의 소 후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소와 백로가 서로 공생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소들은 새 풀밭으로 이동하면서 키 큰 풀들을 잠재워 주면서, 메뚜기와 여치 등 곤충들을 놀라게 하여 백로들에게 먹이를 제공한다.

백로는 소들이 쉴 때 너른 등에 올라앉아 파리와 진드기를 파먹는다. 이렇듯 이 둘은 사이좋게 대자연의 품속에서 서로가 공생 공존의 법칙을 잘 지켜가며 살아간다.

백로가 소 등에 타도 그냥 쳐다보고 그러다 정 성가시면 꼬리 한번 툭 치는 소들의 우직한 모습,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사는 여유로운 세상이어야 한다고 본다.

철쭉꽃밭을 한가로이 노니는 한우
철쭉꽃밭을 한가로이 노니는 한우

소들은 모성애가 상당히 강하다. 제아무리 섞어놔도 자신이 낳은 새끼는 여측없이 찾아낸다. 그러다 새끼가 없어지는 날이면 난리가 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몇 날 며칠 새끼만 찾는다. 때로는 사람보다 나을 때가 더 많다고 말하는 최차열 사진작가.

그는 올해로 사진을 찍은 지 50여 년이 됐다. 왜 사진을 찍고 있는지, 그중에서도 하필 소의 사진을 최선의 노력으로 렌즈에 담는지를 아직도 늘 자신에게 묻는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정열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사진 찍는 정열을 돈 버는 데다 몰방했으면 식구들에게 부라도 남겨줬을 텐데 그렇지 못해 가족들에게는 참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어마어마한 부자입니다, 소 한 마리 값이 적어도 3백만 원이라면 적어도 저는 천몇백 마리를 (사진)가지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몇십억이 넘잖아요

그가 내민 한우 사진집에는 삶의 애환과 진솔함이 묻어 금세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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