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림만 스토리텔링】 ‘신검 칠지도’의 고향, 도성리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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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림만 스토리텔링】 ‘신검 칠지도’의 고향, 도성리⑦
  • 박두웅 기자
  • 승인 2021.08.27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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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신검 칠지도 제작 야철지, 도성리
서산시 지곡면 칠지도 마을 도성리를 알리는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석
서산시 지곡면 칠지도 마을 도성리를 알리는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석

 

이슬이 모여 숲을 이루는 곳”...가로림만(加露林灣)의 물안개가 걷히면서 광활한 도성리 갯벌이 모습을 드러냈다. 갯벌 규모가 드론으로도 다 담기 어렵다. 국가지정갯벌체험장이라 불릴만 하다.

소나무 숲이 시원한 도로를 달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도성3리 마을회관 앞에 일본 국보 신검 칠지도 제작 야철지라는 비가 서 있다.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는 칠지도 제작지로 알려진 곡나철산의 유력한 후보지역 중의 한 곳이다. 옛부터 쇠, 철이 많이 나와 쇠팽이(冶鐵址) 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지금도 마을회관 옆에는 대장간 우물이 남아 있다.

 

마을회관 앞에 위치한 칠지도를 제작한 현장임을 알리는 비석
마을회관 앞에 위치한 칠지도를 제작한 현장임을 알리는 비석
철을 담금질할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샘
철을 담금질할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샘

 

마을에는 쇠풍리골(쇠팽이)과 음불이골(은부리)이 남북 방향의 낮은 고개를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주변을 중심으로 쇳똥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쇳똥은 제철을 하고 남은 찌꺼기다.

일본 국보 신검 칠지도는 제례용 칼이다. 현재 일본 나라(奈良)현 덴리(天理)시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길이가 74.9인 칠지도는 좌우에 3개씩 가지가 붙어 있다. 칼끝을 포함해 가지가 7개라고 해서 칠지도(七支刀)’라 불려 왔다.

18748월 신궁 주지였던 스가 마사토모(菅政友)가 칼에 쌓인 녹을 벗기는 과정에서 총 61자의 명문을 찾아내면서 칠지도가 발견된 일본과 한국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왔다.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는 귀중한 역사적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칠지도는 역사 속의 신검으로만 알려졌었다. ‘일본서기신공 52(372)조에 백제의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 칠지도 1, 칠자경(七子鏡) 1면 등 각종 중요한 보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칠지도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百兵宜供侯王○○○○(416일병오정양조백련철칠지도○○백병의공후왕○○○○)”(앞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後世(선세이래미유차도백제왕세기생성음고위왜왕지조전후세)”(뒷면) 에 새겨진 명문은 앞면에 34, 뒷면에 27자가 금으로 상감(象嵌)돼 있다.

 

칠지도 일본 전래에 대해 만화로 그린 게시판
칠지도 일본 전래에 대해 만화로 그린 게시판

 

금상감 기법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동북아시아에서 그 이전에 금상감법이 확인된 바 없어 칠지도는 백제가 이 기법을 최초로 개발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인식돼 왔다. 칠지도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백제 공예 기술의 실체를 잘 확인시켜주는 걸작 예술품이지만 고대 백제와 왜 간 관계를 설명해주는 유물로서 한일 학계에서 더 주목받았다.

명문 맨 앞에 연호로 짐작되는 ()’를 근거로 제작 시기를 추정하면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92)의 치세 시기다.

근초고왕은 371년 정예병 3만명을 이끌고 평양까지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살해하고 중국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뤘던 정복 군주다.

근초고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의도는 뭘까. 흔히 동양에서는 하위 나라가 상위 나라에 조공하거나 공을 세우면 상급자의 신표로 칼이나 거울 등을 하사해 치하했다. 근초고왕은 그런 성격의 칼을 나뭇가지 형상으로 만들어 왜왕에게 내렸던 것이다.

하필 나무 형상인가.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신목(神木)이 천상계와 지상계를 이어주는 통로라고 인식했다. 칠지도는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백제 왕권의 신성성 내지는 초월적인 권위를 만방에 알리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 돼지를 닮은 저()섬의 사연

 

돼지섬이라 불리는 저섬 들어가는 길
돼지섬이라 불리는 저섬 들어가는 길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는 아주 먼 옛날 돼지가 달아난 마을이라는 뜻의 지곡면 저주리(地谷面 猪走里)로 있다가 1895(고종 32)에 성동(星洞)과 도원리(桃源里)로 나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지금의 지곡면 도성리(地谷面 桃星里)로 바뀌게 되었다.

기자는 벌섬지 방조제를 넘어 그 달아난 돼지를 찾아 나섰다. 가로림만에는 하루에 2번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몇 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 나타난 돼지섬도 그중 하나로 썰물이면 섬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누렁이 엄마와 흰둥이 아가가 길을 인도한다.

 

저섬 들어가는 길에 동네 누렁이 엄마와 흰둥이 아가가 길을 인도한다.
저섬 들어가는 길에 동네 누렁이 엄마와 흰둥이 아가가 길을 인도한다.

 

돼지를 닮았다하여 돼지자를 써서 저섬이라고 불리우는 섬은 4만여평이 되는 큰섬이다. 지금은 사유지다. 수년 전에 자연발화로 화재가 나기도 했다.

 

수년전 저섬에 화재가 발생했다.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수년전 저섬에 화재가 발생했다.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돼지섬에 얽힌 이야기가 재밌다.

어느 날 근초고왕의 명을 받은 도장공들이 온 정성을 다하여 칠지도를 완성하는 날이 다가오자 동네 돼지들이 수군거렸다. “곧 있으면 신검 칠지도를 하늘에 바치는 제를 지낼텐데 어쩌지?” 모두 걱정 근심에 빠졌다. 그중 가장 살찐 돼지 하나가, 모두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자 근심 걱정에 빠졌다. “, 하필 나란 말이지.” 탈출을 결심한 살찐 돼지는 때를 기다렸다. 사실 살찐 돼지는 가로림만 용궁의 주방장으로 먹탐이 많아 용왕님의 음식을 훔쳐 먹다가 벌을 받아 돼지로 환생한 존재였다.

마침내 칠지도가 완성되고 동네 사람들은 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돼지를 잡으러 온 어설픈 노인네의 손길이 아차 하는 순간, 이때다 하며 주둥이를 잡은 손을 뿌리치고 가로림만을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려 바다에 도착한 돼지. 하지만 어쩌리. 네발은 갯벌에 푹푹 빠지고 밀물이 몰려들어오니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가로림만 용왕님! 제 잘못은 이미 뉘우쳤습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자 갑자기 몰려든 물안개가 사방을 덮고 마을 사람들도 더 이상 쫒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됐다. 한 시즌이 지난 즈음 바닷바람이 불자 시야를 가리던 물안개가 사라진 자리에 커다란 돼지를 닮은 섬이 눈 앞에 나타났다.

마을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그때부터 마을 이름도 돼지가 달아난 마을저주리(猪走里)로 불리었다는 이야기다.

기자는 재미난 이야기를 뒤로 하고 하루에 두 번 출입을 허락해주는 돼지섬으로 들어갔다. 물때를 맞춰 나와야 하니 마음이 급하다. 돼지 목 부위에 해당하는 언덕을 지나 섬 건너 편에 당도하니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점점이 흩어진 섬들과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 비경이 숨어 있었다. 갯벌에는 초록빛 감태가 가득하다. 탄성이 나왔다. 텐트를 가지고 와 하룻밤 머물고 싶은 섬이다.

 

저섬 넘어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저섬 넘어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저섬 너머에 펼쳐진 감태 군락지
저섬 너머에 펼쳐진 감태 군락지

 

옆으로 솔섬, 닭섬이 징검다리처럼 멋진 구도를 잡아주고, 이름도 없는 작은 바위섬들은 새똥 마냥 뿌려져 있다. 인위적이지도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부담스럽지도 않다. 가로림만 본연의 그 자연스러움. 그 속에 수만 년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바위가 있고, 수천 년의 사람들이 웃고 울던 소리가 녹아 있다.

 

# 솔섬으로 떠내려 온 쇠북 이야기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수덕사의 여승송춘희 노래 가사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주 먼 옛날 도성리 솔섬 앞에 쇠로 만든 북이 떠내려 왔다. 쇠북은 금고(金鼓)란 금구(金口), 반자(鈑子) 등으로 불리는 사찰 의식 법구 중의 하나이다. 이 북은 지름이 무려 4m이고 넓이가 1m나 되는 거대한 쇠북이었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누가 쇠북을 타고 왔는지, 아니면 쇠북이 홀로 바닷물에 떠밀려 마을 해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쇠북을 새말에 있는 큰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마을에 긴급한 일이 있을 때 이 북을 쳐서 알렸다. 이 북은 소리가 아주 커서 십리 밖까지 들렸고 마치 소가 우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이 북을 보물로 여겼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어찌어찌하여 이 쇠북이 현재의 수덕사로 옮겨진 것 같은데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 징발되어 빼앗겼다고 한다. 수덕사의 여승노래를 작사한 김문응 씨가 그 사연을 알고 가사를 지었는지, 아니면 수덕사 종소리를 잘못 알고 가사를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암튼 수덕사가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쇠북 때문이고, 대중가요로 탄생하면서 더 유명해졌다는 도성리 마을사람들의 주장이다.

가로림만 도성리포구로 밀물이 성큼성큼 들어 온다. 저 멀리 갯벌은 멀쩡하게 드러나 있지만, 포구쪽으로는 이미 물살이 소용돌이를 치고 있다. 갯벌에 빠지지나 않았는지 누렁이와 흰둥이는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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