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중고제 맥을 잇다 - 1편
판소리 중고제를 탄생시킨 어머니는 ‘내포문화’

18세기 전반 충청도 고지도(필사본 여지도첩)
18세기 전반 충청도 고지도(필사본 여지도첩)

 

고제(中制)와 신제(新制)의 연결고리 중고제

 

판소리 유파를 경기·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고제와 섬진강 동쪽 동편제, 그리고 서쪽 서편제로 크게 구별하는 경향이 대세다. 그중 중고제는 그 맥이 희미해져 기록조차 찾기 어렵다.

하지만 예로부터 국악 가무악이 전국에서 가장 성행했던 곳이 경기·충청도였다. 그 중심에 중고제가 있다. 동편제나 서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소한 중고제(中高制)는 고제(中制)와 신제(新制)의 중간 시기에 성행한 소리제를 의미한다. 호걸제는 중고제보다 일찍 사라졌고, 중고제는 20세기 전반기부터 점차 약화되다가 20세기 말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동편제와 서편제는 신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호걸제는 판소리의 유파 가운데 하나로 경기 충청 지역에서 오래전에 성행한 소리제이다. 권마성제, 권제, 설렁제, 호걸제라고도 한다. 고형의 중고제보다 일찍 사라진 말이고 염계달, 김성옥, 송수철, 김봉학 같은 고제 명창이 구사한 판소리이다.

호걸제의 창시자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은 기록으로 전하는 최초의 명창인 하한담(河漢譚)과 최선달(崔先達, 1726-1805)의 후배이다. 그들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염계달(廉季達)이 권삼득의 창법을 많이 본받았다고 한다.

가마꾼의 권마성(勸馬聲) 가락을 본떠서 권삼득(權三得)이 만든 호걸제는 씩씩하고 호탕한 느낌을 주는 악조이다. 춘향가 중 군로사령(軍奴使令)이 춘향이를 잡으러 가는 대목이나 흥보가 중 놀부가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에서 호걸제가 사용됐다. 권마성이란 임금·고관 등의 귀인이 행차할 때, 이를 수행하는 교군(轎軍)들이 행차의 위세를 더하기 위해 높고 길게 불렀던 소리이다. 권마성 가락을 본떴다는 의미에서 '권마성제', 권삼득의 더늠이라는 데에서 '권제', '가볍게 팔을 저어 바람을 내면서 걷다' 혹은 '침착하지 못하고 경망스럽다'는 뜻의 '설렁거리다'·'덜렁거리다'라는 말을 끌어와 '설렁제'·'덜렁제', 호기롭게 거드럭거리는 느낌이라 하여 '호걸제'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정노식(鄭魯湜, 1891-1965)조선창극사에서도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와 더불어 호걸제를 유파의 하나로 언급한 바 있다.

 

중고제의 탄생 기반은 내포문화

 

서해바다가 내륙 깊이 들어와 안으로 포구를 이룬 곳. 우리는 이 지역을 내포라고 부른다. 충청도는 이런 점으로 보자면 두 개의 내포가 있다.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내포(편의상 아랫내포로 칭한다)와 당진에서 서산과 예산, 홍성에 이르는 내포(편의상 윗내포라고 부른다)가 있다.

윗내포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서산과 해미, 덕산, 예산, 홍성 결성이 중심지였다. ‘아랫내포는 부여, 서천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 하구영역에 해당한다. 사비백제시대(지금의 부여) 구드레 포구가 국제무역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조선시대까지만해도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뱃길이었다.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였으니 강과 해안이 그 물류 기능을 담당했다. 한반도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내포지역은 남족에서 올라오는 풍부한 물산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으로 서울·경기 문화와 호남 문화의 중간적 점이지대에 위치한다.

기록을 살펴보자. ‘윗내포물류의 상징으로 예산 구만포(九萬浦)를 예를 들면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구만포는 삽교천 중류인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 있었던 포구이다. 구만포라는 명칭은 뱃길로 벼 9만 섬을 실어 날랐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만큼 구만포를 통한 조세곡의 운반과 물류유통이 활발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구만포가 성장하면서 이를 배후로 하는 장시도 활성화되었고, 포구와 오일장을 연결하는 보부상도 번성하였다.

19세기 중엽 예산, 덕산, 면천, 당진의 보부상 조직으로 구성된 예덕상무사는 구만포와 인근의 별리, 하포리, 두리 등에 지소(임소)를 두고 운영하였다. 그 영향력이 남아 구만포는 1960년대까지도 소금과 새우젓을 운반하는 보부상들로 북적거렸다고한다.

아랫내포로는 논산 강경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강경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풍부한 물산을 충청도와 전라도 각 지역으로 실어 나르고, 다시 이 지역에서 실어 나온 물산을 전국으로 연결시키는 심장 동맥과 같은 곳이었다. 충남 보부상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에 거대 포구이자 상업 도회지가 바로 강경이다. 논산 강경은 황해의 조류에 영향을 받아 근세 초기까지도 밀물 때에는 돛을 올린 큰 배들이 깃발을 흩날리며 가마득하게 몰려왔던 곳이다. 금강 하구부터 밀물을 타고 배가 올라오는 모습은 마치 수많은 전함이 진영을 짜서 끝없이 밀려오는 듯한 장관을 이뤘다. 이처럼 내포는 사람과 물자, 문화를 이어주는 핵심 공간으로 역할하며, 이른바 내포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물류의 상징이었던 보부상을 살펴보면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는 조선시대의 예산(禮山덕산(德山면천(沔川당진(唐津) 등 네 개 고을의 보부상단이 1851년에 연합한 조직으로 천안을 비롯하여 충북까지 그 영역이 미쳤다. 또 홍주와 광천을 중심으로 보령·결성·청양·대흥 등 여섯 개 시장 권역을 아우르던 원홍주육군상무사(元洪州六郡商務社), 금강하구를 중심으로 한산·서천·부여·임천·홍산·정산·비인·남포 등 무려 여덟 개 군현의 시장 권역을 포괄하던 저산팔읍상무사(苧産八邑商務社)가 활발히 활동했다.

물류가 모이고, 경제활동이 활발한 곳. 내포에 문화예술이 발달한 것은 당연지사다. 중고제 판소리의 거장 서산의 심정순이 낙원식당을 운영하고 동편제, 서편제 명창을 포함한 수 많은 명창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모이고 흩어진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내포제 소리문화의 탄생...‘내포제 시조와 중고제

 

이와 같은 내포지방에는 일찍이 내포제 소리문화가 탄생, 발전했다. 충청도 사람들에 대해 흔히 인심 좋고 순박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말투도 남에게 쉽게 화내지 않고 온후하며, 느짓하게 여유를 갖고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르게 말해서는 쉽게 속내를 보이지 않으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의뭉스럽다고 한다. 조선후기 지식층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던 충청도는 말을 하듯 책을 읽듯 담담하고, 가곡이나 시조같은 우아하고 씩씩한 곡조가 많았다. 감성을 자극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려는 태도보다는 꿋꿋한 기상과 체면을 중시한다든지, 뽐내고 과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포지역의 소리문화는 대체로 밋밋한 느낌을 준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예술로 표현해내는 것이 이 내포제 소리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소리문화가 형성되는 이면에는 그곳 지역사람들의 정서가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다. 내포제 시조가 그러하고 중고제 판소리 또한 그와 같다.

다만 내포제 시조는 대체로 상층문화인 반면, 중고제 판소리는 애초에 서민층의 광대가 부르고, 서민들이 즐기는 전문적인 감상노래였다.

내포제 시조를 살펴보면 윗내포’, ‘아랫내포로 나뉘고 있다. 소동규-김원실로 이르는 내포제 시조(충남지방 문화재 제17)는 금강유역의 부여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보를 지칭하며, 충청남도의 서북부 지역인 서산·당진·예산·홍성 지역을 기반으로 전승되고 있는 내포제 시조’(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7-2)는 서산지역을 기반으로 이문교 조사문 김경숙 박선웅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처럼 중고제 판소리에도 두 개의 큰 가닥이 나뉜다. 하나는 금강 유역의 김성옥이나 이동백을 통하여 전승되는 유파이고, 다른 하나는 내포지역의 방만춘, 고수관을 통하여 전승되는 유파이다. 충청도 지역의 판소리를 아울러 지칭할 때는 중고제·소리라고 표기하지만 특별히 윗내포지역의 판소리에 한정할 경우에는 내포제 판소리라 부른다.

 

충남 홍성군 결성면 출신의 최선달(崔先達, 1726~1805) 기념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출신의 최선달(崔先達, 1726~1805) 기념비

 

윗내포, 결성의 최선달 판소리를 비조로 평가

 

윗내포 지역은 충청남도 서북부의 넓은 지역을 아우르며, 여타 충남 지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판소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서산과 홍성을 근거지로 내포제 판소리는 창조되고 발달했다.

그 맨 앞자리에 판소리계에서는 최초의 판소리 명창으로 일컫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 출신의 최선달(崔先達, 1726~1805)이 있다. 최선달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나 18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으로, 본명은 최예운(崔禮雲)이다. 사승관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최선달 명창의 직계후손 최재신 선생(충남무형문화재 20, 결성농요 예능보유자)최선달이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자 전국에서 소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이 집에 몰려들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면서 인근에 있는 누에산으로 피신을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1998년에 최선달과 관련된 고증작업이 실시됐는데 후손인 최재설 씨(당시 결성면장) 집안에 전해오던 글이 결정적 단서가 됐다. 붓글씨로 적힌 종이에는 “25세인 예운 할아버지가 명창으로 이름나서 가선대부의 품계를 제수받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 글을 근거로 집 뒷산의 최씨 집안 비석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가선대부 최공지묘(嘉善大夫 崔公之墓)’라고 새겨진 비석이 발견됐다. 이 비석은 이장을 하면서 현재 결성농요농사박물관 앞 마당에 세워져 있다.

근현대 동편제 명창 전도성(1864 ~ ?)은 자기의 소년 시절 명창 박만순·이날치의 소리풀이(광대가 판소리를 마치고 최종에 과거 역대 명창을 순서로 일일이 호명한 후에 다시 자기의 독특한 가조(歌調)로 한바탕 노래하기)에서 광대의 효시(嚆矢)로 하한담(河漢潭)과 최선달을 꼽았다고 전한다. 그 뒤를 이어 중고제의 비조 김성옥과 그의 가문 사람, 즉 김정근-김창룡-김시준 등이 홍성에 본적을 두고 기거, 활동하였다. 특히 19세기 전반 전기 팔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춘풍은 중고제의 또 다른 유파를 생성했던 양반광대로 고창의 신재효와 버금가는 이론과 실력을 자랑했다. 그의 제자 유공렬이 바로 홍성을 고향으로 두고 은거하였다. 조선 근대 판소리 명창들의 북 반주를 도맡으면서 자신의 춤을 집대성하여 조선전통춤의 아버지가 된 한성준 역시 홍성에서 태어나 홍성에 묻혔다.

인근 서산의 경우 심정순 가문이 대표적이다. 심팔록->심정순, 심상건->심재덕->심매향, 심화영으로 이어지는 심정순 가문은 여러 대를 거치며 윗내포 지역의 문화를 자신들의 소리에 담았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획으로 다룰 예정이다.

서산은 내포제-중고제의 판소리가 존재하는 특징적인 고장으로 우리 판소리사의 전통 속에서 그 명맥이 선명하게 확인되는 중요한 지역이다. 고수관, 방만춘, 심정순이 그중 큰 맥을 이룬다.

현재 서산의 중고제 명가문 심팔록-심정순-심화영의 후손 이애리가 국악 가무악 활동을 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충청도 중고제의 복원과 활성화에 대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뿌리에는 내포제 판소리라는 가치인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김성옥 명창 강경 옥녀봉 중턱에 위치한 생가터
김성옥 명창 강경 옥녀봉 중턱에 위치한 생가터

 

아랫내포김성옥-김정근-김창룡 가문

진양조를 창시한 논산 강경의 김성옥

 

충청도 서천 중고제 판소리 명가문인 김성옥-김정근-김창룡-김세준, 그리고 마지막 명창 김차돈과 그 후손이 생존해 있다. 그중 김창룡을 주목해 본다.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정정렬과 함께 근대 5명창으로 지목되는 김창룡은 김성옥-김정근-김창룡의 가계로 이어지는 중고소리의 대표적인 맥을 잇고 있지만 동편제로 분류된다. 조선창극사』 「김창록조에서는 김창록을 동편제 명창으로 분류했다. 중고제와 동편제, 서편제의 지역적 구분이 무색해지고 명창이 사정에 따라 이사를 하여 사는 지역이 바뀌기도 하면서 유파의 구분은 자연스레 이전의 지역적 기준보다는 명창 자신의 기준에 의하여 유파를 나누게 되었다.

조선창극사를 쓴 정노식이 지역의 표준을 떠나서 소리의 법제만을 표준하여 분파되었다라는 지적은 바로 동편제나 서편제가 전승 지역보다 소리의 법제에 의한 구분이라는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주 박동진 명창 전수관에 세워진 충청도 명창들의 기념비(좌로부터 김성옥, 고수관, 정춘풍, 이동백, 정정렬 명창)
공주 박동진 명창 전수관에 세워진 충청도 명창들의 기념비(좌로부터 김성옥, 고수관, 정춘풍, 이동백, 정정렬 명창)

 

정노식은 중고제는 다양한 가계의 다양한 소리제로 전승되어 왔는데, 송흥록을 기점으로 하여 동편제가 새로 생겨나자, 경기·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소리제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전환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고제는 김성옥과 염계달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김성옥은 순조시대 인물인데 충청도 강경리 일끗리에서 생장하고, 후에 여산읍에 이거하다가 30세에 조사(早死)하였다. 그는 학슬풍에서 좌각이 되어서 수년간 출입을 못하고 병석에 누워서 가곡을 연구하다가 진양조를 발견하였다. 송흥록과 남매간이므로 송이 종종 심방하였다. 어느 때 찾아가서 근래는 병세가 어떠하며, 과히 고적하지나 아니한가의 의미의 말을 늦은 중모리로 부르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김은 병석에서 고독의 비애를 몹시 느낀다는 의미의 말을 진양조로 화답하였다. 그때까지는 중모리만 있었고, 진양조는 없었다.(후략)” 진양조의 탄생 실화다.

김성옥의 소리는 아들 김정근이 잇는다. 김정근은 충청도 강경리에서 출생하여 철·고 양대간에 무숙이타령으로 과히 명성이 있었고 <삼궁접>이라는 곡조를 창시하였다 한다(조선창극사115). 김정근의 소리는 아들 김창룡·김창진과 이동백, 황호통, 최승학에게 전승되었다.

한편, 기자가 찾아 간 김성옥과 김정근이 태어났다는 강경 일끗리의 위치는 아쉽게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강경 옥녀봉 중턱에 김성옥 터자리만 확인할 수 있었다.

 

염계달 명창이 득음을 했다고 전해지는 충북 음성 가섭사 득공터
염계달 명창이 득음을 했다고 전해지는 충북 음성 가섭사 득공터

 

염계달 명창...중고제 표준만들어

충남 덕산 또는 충북 음성 출신 논란

 

염계달은 판소리 중고제의 기초 등 성음 표준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거의 대부분 충청도 중고제 명창들이 염계달 명창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서산의 고수관 명창도 그중의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염계달 명창은 중고제의 가장 위, 그러니까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염계달은 어떤 인물일까.

염계달은 조선시대 전기 8명창에 속한다. 당시 판소리 기량이 가장 뛰어난 명창을 8명창으로 불렀는데, 염계달과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등이 전기 8명창에 속한다. 그의 출생지는 경기도 여주(혹은 충청도 덕산), 살았던 지역은 충북 충주, 득음장소는 충북 음성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염계달은 당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의 출생지에 대한 보다 철저한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더구나 고수관을 비롯하여 당시 충청도 중고제 명창들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의 활동 영역을 충주에 한정지우는 것은 오류를 야기할 수 있다.

 

경기도 여주군에서 염계달이 득공한 장소라고 주장하는 신륵사 ‘강월헌’
경기도 여주군에서 염계달이 득공한 장소라고 주장하는 신륵사 ‘강월헌’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광한루 대목인 네 그른 내력이 염계달의 대표적인 추천목으로 이 대목의 선율은 서산 해미출신 명창 고수관제 자진사랑가와 비슷하다.

노재명 판소리 학자는 조선시대 전기 8명창 가운데 한명인 고수관 명창이 염계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고수관이 특히 잘했다는 엇청의 원류가 염계달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노식은 초기 판소리인 중고제가 염계달 법제를 계승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점에서 염계달 판소리가 중고제의 표준과 같다는 게 국악계의 설명이다. 다음 호에서는 중고제 명창들의 이야기, 그리고 수부도시 공주에서의 활동과 함께 해미읍성, 공산성에서 펼쳐진 중고제 판소리에 대해 글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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