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해루질에서 생선장수까지, 그리고 색소폰을 사랑한 신미숙 선생
상태바
【인터뷰】 해루질에서 생선장수까지, 그리고 색소폰을 사랑한 신미숙 선생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1.07.20 23: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돈요? 싸 짊어지고 가는 거 아니잖아요. 제2의 인생은 색소폰과 함께 살아요”
색소폰을 사랑한 신미숙 선생
색소폰을 사랑한 신미숙 선생

나는 음악을 하지 않았으면 여전히 동부시장 모퉁이에서 해산물을 팔고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서 했던 소중한 일일 뿐이다.

인생 반으로 접고도 한참을 더 접은 나이에서야 가만히 나를 돌아보니 그토록 오랜 시간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었다.”

한여름 장대비가 도심 곳곳을 두드리던 19, 어린 세 딸을 키우며 해루질에서 생선장수까지 한시도 따스한 방안을 차지하지 못했던 일흔한 살 신미숙 선생을 만나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은 여전히 그 일을 해나갔다면 나는 귀하디귀한 내 인생을 낭비할 뻔했다지금 이 순간 가장 잘한 일은 내 남은 시간이 부족할까 두려울 정도로 색소폰을 부는 일이라고 했다.

Q 만나 뵙게 되어 너무 반갑다. 어린 시절 얘기를 듣고 싶다.

해방 뒤 남북이 38선으로 갈라지고 어수선한 정국이 이어지다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았다. 나는 이제 칠순을 넘긴 6.25둥이다.

6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난 나는 자라면서 공주 마곡사 인근 산을 누비며 나물을 뜯었고, 어머니는 새벽녘 으슴푸레한 달빛을 받으며 마곡사 앞으로 좌판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나셨다.

그 당시 시골은 눈 떠서 하루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 게 일과였던 시절이었다. 특히 날이 가물어 논에 물을 대지 못하는 해에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워 산속을 누비는 시간이 더 많아지곤 했다.

국민학교는 집에서 4km를 걸어 다녔다. 새벽같이 일어나 한 글자라도 더 배우려고 작은 걸음으로 구불구불 산길을 걸어 다녔다. 그때는 왜 해는 또 그렇게나 빨리 산등성이를 돌아나가는지.

한글하고 곱셈만 하면 아무거라도 해 먹고 산다. 여자는 딱 그기까지만 배워도 충분혀아버지의 말씀은 곧 법이었다. 언니 둘은 이미 유구에 있는 공장으로 일찌감치 떠난 후였다. 알면서도 나는 중학교에 다니고 싶어 부모님 품에서 떼를 쓰며 매달렸다. 소작농의 가장으로 여덟 식구를 먹여 살렸던 부모님 속은 어땠을까.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훨씬 어렸을 두 분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아리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했다. 먼발치에서 가방을 메고 다니는 또래 친구들을 발견하면 자존심이 상해 숨기부터 했다. 폴짝폴짝 뛰어가는 그네들을 보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나는 언제 저렇게 다니나싶어 자꾸 숨어서도 친구들이 떠난 빈 길을 돌아보곤 했다.

"남편과 함께 한 세월이 어느듯 50년을 넘어섰다. 지금생각하면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남편과 함께 한 세월이 어느듯 50년을 넘어섰다. 지금생각하면 참 고마운 사람이다."

Q 공주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서산으로 오게 됐는지.

그 얘기를 하려면 좀 길다. 내 나이 21살 때 친구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맞나 태안 바닷가 근처로 시집을 왔다. 공주 산골 아가씨가 조개를 캐고, 감태를 뜯고, 갯지렁이를 잡았다.

어촌에서 제일 큰 소득원은 뭐니뭐니해도 갯지렁이였다. 처음 맨손으로 갯지렁이를 잡았던 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너무 징그러워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진저리를 쳐가면서도 꾸역꾸역 잡아야했던 스무 살 어촌 새댁이었다.

갯지렁이는 길기도 어찌나 길던지 자그마치 50cm나 됐다. 녀석은 소시랑에 엄청난 힘을 가해야만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가위에 눌릴 때가 많았다. 그래도 이튿날이면 또 어제와 다름없이 바닷가로 나가 태연한 척 그놈을 잡았다. 그렇게 익숙해져 갔다.

1970년 갯지렁이는 외화벌이의 효자였다. 당시 돈으로 2만 원에서 25천 원을 받았으니까 엄청난 금액이었다. 처음에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웬걸 나중에는 언제 그랬는지 겁이 없어지고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가만히 보면 귀엽고 징그럽고 아름답고 추한 것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은 생명의 원천수"라는 신미숙 선생
"사랑하는 가족은 생명의 원천수"라는 신미숙 선생

Q 장갑을 끼고 잡지 그랬나. 갯지렁이 외에도 태안에는 바지락이 유명한 거로 아는데

장갑을 끼면 안된다. 오롯히 맨손잡이다. 당시만 해도 바지락이 엄청났다. 내가 사는 팔봉면 호리에서 고파도() 앞까지 걸어 들어가 바지락을 캤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물 들어오기 전에 얼른 작업을 해야 하니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니 언감생심 먹는 일은 꿈도 못 꿨다.

작업을 마치면 남편과 함께 이고 지고, 그것도 모자라 바구니를 옆에 끼고 십리를 걸어나왔다. 까딱 잘못하면 물에 갇힐 수도 있어 무거운 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무거울수록 즐거웠다. 하지만 그래도 욕심부리는 일은 금물이었다. 느린 걸음도 금물이었다. 내 목숨이었지만 내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항상 세 딸의 눈동자가 늘 우리 부부 심장 근처에 있었다.

Q 그렇게 바쁘게 생활했는데 어린 세 딸은 누가 돌봤나?

결혼함과 동시에 시할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우리 부부가 바다 일을 하는 동안 시할머니께서 금이야 옥이야 키워주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라며 노래를 불러주셨던 시할머니의 사랑 가득한 미소다. 그렇게 지혜로우시고 현명하셨던 그분은 향년 83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그해, 초등학교 4학년을 비롯한 아이 셋을 앞세우고 죽도록 고생해도 희망이 없는 호리 생활을 거두고 서산 시내로 이사를 나왔다. 무엇보다 집에서 팔봉 양길리까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약 4km를 아장아장 걸어 다녔던 딸들의 등하교가 너무 애처로웠던 것도 한몫했다.

제2의 삶을 응원하기위해 방문해준 사랑하는 가족들
제2의 삶을 응원하기위해 방문해준 사랑하는 가족들

Q 시할머니께 많이 의지하셨던 것 같다. 서산으로 나오셔서 했던 일은 뭔가?

특히 남편이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서산에 방 한 칸을 얻어서 다섯 식구가 살았다. 험한 바다일 대신 태안 안흥에서 광주리 3개에 생선을 떼다 서산 동부시장 한 켠에서 좌판을 벌였다.

처음에는 참 고단했다. “이거 내 자린데 왜 앉았냐며 대야를 끌어다 집어 던지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집어 던진 그 자리에 다시 터를 잡고 앉아 물건을 팔았다. 발길질로 차버리면 나가떨어진 곳에 앉아 또 팔고, 쫓겨 다니면서도 팔고, 울먹이면서도 팔고. 그렇게 당하다 보니 내성도 생겼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자리를 바꿔가며 팔다보면 어느새 기웃기웃 저녁해가 저물어갔다.

33살 새댁의 몸으로 생선장사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시간이었다. 어느날은 너무 힘들어 땅콩밭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 그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니 그 일은 생선장사보다 더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안흥항을 찾았다.

그런데 세상 가장 힘든 일이 한가지 있었다. 시장통에 앉아 장사를 하다 보면 내 또래 새댁들이 자녀들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물건을 팔다가도 그 모습에 쫓겨 시선을 팔곤 했다. 집에 있을 세 딸에게 너무 미안해서다. 엄마를 기다릴 세 딸이 너무 애처로워서다. 아이 때문에 웃었다면 또 사랑하는 아이들 때문에 울기도 했던 날들. 미안해서, 너무너무 못 해준 게 많아서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색소폰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품게 됐다"는 신미숙 선생
"색소폰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품게 됐다"는 신미숙 선생

Q 마음고생이 엄청났겠다. 새벽부터 물건을 떼러갔다가 다시 좌판에서 생선을 팔았으니.

그래도 나보다 5살 많이 먹은 분을 만나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분이 어느날 여자 혼자 하기에는 너무 힘드니 함께 동업하자는 말을 했다. 막연히 동업하면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을 때 돈 갖고 욕심부리면 못 하지만 돈에 욕심 안 부리면 할 만해요라는 말에 희망을 얻었다.

그때부터 나는 물건을 해오고 그분은 물건을 팔고. 그렇게 우리의 동업은 10년을 이어나갔다. 신용과 믿음이 있었기에 늘 서로 보듬고 챙겼다. 정말 돈에 욕심부리지 않으니 싸울 일 없이 서로 친자매처럼 살가웠다.

그런 와중에 온양에서 장사하시던 시이모님이 갑자기 뇌출혈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 여파로 나는 서산에서 온양으로 동서와 같이 내 본업의 터를 옮기게 됐다. 온양은 바다가 없으니 서산보다 장사는 훨씬 성황을 이뤄 손에 쥐는 수입이 솔찮이 많았다. 하지만 먼 길을 달려가는 일인 만큼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Q 새벽에 온양으로 넘어갔다가 늦은 저녁에 서산으로 다니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닐 텐데 세상에 큰일 날 뻔했다.

돌아보면 참 모질게도 힘든 시간을 거쳤다. 너무 힘드니까 언제부턴가 막내딸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생선장사를 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란 걸 살아가면서 절실히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그렇게 마음먹고 정말 실천에 옮겼다.

서산에서 온양으로 다닌 지 7년 만에 막내딸까지 대학을 졸업했고 나는 드디어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더는 무릎까지 오는 길을 뚫고 장거리를 가지 않아도 됐고, 한여름 푹푹 찌는 무더위를 견디지 않아도 됐다.

마지막 장사를 하는 날, 가슴이 먹먹해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생활고를 타계하기 위해 억척스러운 아낙이 되어야 했던 시간들. 그 긴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에 펼쳐져 눈물이 났다. ‘이제 다시는 장사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며 서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 달 쉬는 동안 몸이 근질근질한 건 뭔 일일까. 하는 수 없이 동부시장 안에 있는 태안수산을 사서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하루 열 가지가 넘는 종류를 자그마치 1000kg씩 주물렀다. 그렇게 65세가 될 때까지 호황을 누렸다.

어느날 내 속의 내가 직언을 해주었다. “아무리 잘 돼도 니가 돈을 좇아가면 안 되지. 니 인생은 귀해. 그냥 이렇게 마무리하면 니가 너무 억울하잖아그 밑바탕에는 우리 아이들과 남편의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발 장사 좀 그만해. 우리 소원이야

색소폰을 사랑하는 심미숙 선생
색소폰을 사랑하는 심미숙 선생

Q 정말 수고하셨다. 그때부터 편하게 쉬면서, 취미생활도 하고 여행도 다녔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달라.

안 그래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이 몸을 따라가지 못했다. 내 나이 65세 되던 해 과감히 장사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서서히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좋다는 병원은 다 다녔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이 내 마음마저 병들게 했다. 그런 찰나에 우연히 미장원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는 분을 만났다.

변변한 학력도 없는 내게 악보는 보는 건 걱정마세요. 3일이면 다 배워요라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악기를 잡았다. 몸이 말을 듣기 시작했고, 그토록 힘들었던 내 심장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응원과 지인들의 응원, 무엇보다 색소폰동아리 회원들의 성원에 힘입어 내 생애 첫 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내 음악에 맞춰 누군가는 치유하리라. 아름다운 멜로디에 나처럼 아팠던 몸이 놀라운 변화를 안겨 주리라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색소폰과 동행하는 제2의 삶이 내게 선물로 다가왔다. 그저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요즘도 종종 사람들이 그렇게 잘 되던 장사를 하루아침에 그만둔다는 게 가능하던가요?”라고 물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이런 말을 해준다. “돈요? 싸 짊어지고 가는 거 아니잖아요. 그저 삼시세끼 먹으면 충분하잖아요.”

욕심부리면 한도 끝도 없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남은 여생 즐겁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길임을 이제는 안다. 내게 여력이 있다면 많은 분에게 음악으로 행복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